배움/인문학

토지 11

꿈트리숲 2019. 6. 10. 06:37

죽음으로 삶을 완성하다

 

 

한주 잘 보내셨나요? 월요일은 토지 하는 날입니다. 드라마도 아니겠고 재밌는 예능도 아닌데, 왠지 월요일이 기다려집니다. 토지를 안 읽은 사람은 있어도 한권만 읽은 사람은 없지 않을까요(저 사실 예전에 2권까지만 읽어더랬는데...). 블랙홀 같은 토지, 한권을 끝낼 때마다 다음 얘기가 궁금해서 일주일 내내 토지만 읽고 싶도록 만드는 토지. 11권 이야기 시작합니다.

 

토지의 등장인물은 모두가 주연이자 모두가 조연입니다. 매주 한편씩 후기를 쓸 때 미처 다 소개해드리지 못하는 인물들이 자꾸 생겨나요. 서희와 길상에게 초첨 맞추다 보면 용이와 임이네를 놓치게 되고, 홍이 얘기를 쓰다보면 봉순이와 상현이 얘기를 건너뛰게 됩니다. 오늘은 자신의 얘기가 언제쯤 나올까 기다리던 두 여인의 얘기를 좀 풀어볼까 해요.

 

토지 1부와 2, 3부에서 평사리와 용정을 욕심으로 주름잡았던 임이네는 생명력이 무척이나 강한 여자였어요. 삶에 대한 애착을 넘어 집착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줬는데, 그 집착이 남편인 용이와 자식인 홍이의 정신을 파먹고 들어가는 벌레 같은 느낌이었지요. 고향으로 돌아와 두 다리 뻗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낼 수 있는 남편도, 간도에서 배운 지식과 훤칠한 인물로 훨훨 날아갈 수 있는 아들도 모두 마음 한구석이 항상 그늘져 있습니다. 식욕과 물욕만 남아있는 아내를 엄마를 숫제 외면하고 싶지만 그렇게 되지 않는 그들의 고뇌가 충분히 느껴져요. 제일 가까운 사이여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사이. 너무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혹은 보고 싶지 않은 그늘. 그늘에서는 그림자의 시비를 헤아릴 수 없어 그냥 두고 보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평생 마음의 그늘로 있을 것만 같았던 임이네가 10권에서 병이 들었고 11권에서는 한 줄 죽음으로 기록되며 잡초 같은 그녀의 삶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3호실의 환자는 임이네였다. 천년을 살 것 같았던 그 무성한 생명력은 어디로 간 것일까. 참혹한 몰골이다. -10390-

 

병에는 장사가 없나봅니다. 아니 세월 앞에는 아무리 끈질긴 목숨도 버틸 재간이 없는 게 세상 이치지요. 순리를 거스르려던 임이네의 숱한 발악은 이제 병과 세월 앞에서 무릎을 꿇고야 말았습니다. 사랑 없는 아내를 떠나보낸 용이의 심정, 미움밖에 없는 줄 알았던 엄마를 잃은 홍이의 심정은 두 부자에게 있어 평생 깨닫지 못했던 연민을 일깨워 줍니다.

 

p 42 한 번도 따뜻하게 대해준 일이 없는 여자, 죽음은 살아남은 사람에게 회한을 남기게 마련이다. 죽음은 모두 그럴 것이지만 뼛골까지 스며드는 외로운 죽음을 용이는 도저히 잊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운 연민이었으나 임이네에 대한 기억은 언제나 절망이었고, 그 절망감은 죄의식을 몰고 오는 것이다.

 

p 216 임이네의 죽음은 죽음과의 무참한 투쟁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체념 못한 죽음과의 투쟁이었다. 애증을 넘어선 그 모습은, 견딜 수 없는 연민으로 종전까지의 홍이를 파괴하고 만 것이었다.

 

고통만이 현실임을 알게 해준다고 하는데, 더 이상 심적 고통을 느낄 대상이 현실에 없어 용이와 홍이는 다소간 현실감을 잃고 마음의 방황을 하는 것도 같아요. 한 많은 삶이긴 했으나 죽음으로 임이네의 삶은 완성형이라고 생각합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줄곧 우리는 죽음을 향해 달려가기에 그 목적지에 도달한 임이네는 어떤 모습으로든 삶을 완성하고 마무리한 것이지요. 이로써 토지 1세대의 얼마 남지 않은 인물이 또 한명 퇴장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기생이 되었던 기화, 봉순이는 안타까운 모습으로 평사리로 돌아왔어요.

 

p 330 이십년 가까운 방랑 생활, 창으로써 일가를 이루겠다고 굳게 결심하고서도 하루아침에 결심을 내동댕이친 일이 몇 번이며 보잘것없는 사내를 따라, 그것도 진정 반해버린 사내도 아니었는데 기생으로 닦은 기반을 걷어차고 전전했던 일은 또 몇 번이었던지, 종국에는 마약에까지 손을 대어 한 줄기의 빛과 같았던 양현을 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최초엔 길상을 잃었고, 다음엔 상현으로부터 버림받았고, 잃어버렸기 때문에 스스로를 버린 기화는 또 버림받았기 때문에 스스로를 잃었고, 마지막 희망을 버렸기 때문에 그는 모든 사물에 대한 인식을 망각한 것이다.

 

기화는 상현과의 사이에서 딸, 양현을 낳았어요. 사랑이라는 감정 없이 서로가 외로워 서로를 잠시 잡고 잡아주고 했던 시기에 아이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상현은 기화가 애시 당초 서희의 몸종, 그러니까 자신과는 어울릴 수 없는 신분이라 생각했기에 봉순이를 미련 없이 버리고 떠납니다. 자신의 딸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며 죄책감 보다는 기생의 몸에서 자신의 핏줄이 태어났다는 것에 치욕감까지 느끼는 겉만 어른이에요. 그러니 기화가 아편쟁이가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어도 기화를 돕거나 딸을 찾는 적극적 태도를 취하지 않습니다. 룸펜으로의 길을 가고자 작정했는지 서서히 망가져 가는 모습에 답답함이 치밀어 오르네요.

 

사랑 없는 두 남녀의 무책임한 행동으로 인해 어린 양현이만 불쌍하게 되었어요. 왜 기화는 마음을 다잡고 살 수 없었을까? 창을 배워서 명기가 되는 꿈을 꾸고, 딸을 보며 적극적으로 살아볼 생각을 왜 하지 않았을까? 이런 의문을 가져보지만 봉순이, 기화가 되어본 적 없는 저는 그 마음과 행동을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평생 진실한 사랑 한번 못하고 떠나는가 싶던 기화에게도 진심을 전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기화는 그 마지막 마음을 온전히 받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완성합니다.

 

p 369 “내가 세상에 나서, 석이처럼 나한테 잘해준 사내는 없었다. 언제나 너를 대하면 마음이 편했어. 어딜 가도, 어느 누구랑 같이 있어도 어찌 그리 마음이 안 편했을까.”

집 없는 강아지 같고, 항상 떠날 차비를 하는 철새 같고... 어디 비비고 기댈 것이라곤 없었어. 어쩌면 그렇게들 인색했던지.”

 

기화를 마음으로 연모하던 석이의 진심을 받고서, 자신을 위해 흘려주는 사내의 뜨거운 눈물을 받고서 기화는 인색했던 상현도, 비빌 언덕이 못되었던 길상도 훌훌 벗고 떠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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