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토지 13

꿈트리숲 2019. 6. 24. 06:24

희망이 조금씩 움직이다

 

 

토지 4부가 시작됐습니다. 옛날 인물들이 대거 퇴장하고 새로운 인물들이 많이 나와요. 3부까지 자주 만나며 친분을 쌓아 온 인물에 대한 애정을 좀 과시할까 싶었는데, 안면도 안 튼 이들의 새로운 등장에 마음이 옮겨가기 좀 바빴습니다.

 

한복은 김두수(거복이) 동생이며 죽은 서희의 아버지 최치수를 살해한 김평산의 둘째 아들이에요. 두수가 아비 김평산을 속 빼닮았다면 한복이는 어미 함안댁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았어요. 거복이는 일찍 평사리를 떠나 지금은 일본 순사부장 노릇하며 독립 운동가들을 눈에 불을 키고 쫓고 있는데요. 반면 한복이는 살인죄인의 아들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평사리에서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살아갑니다.

 

살인죄인의 자손이라는 주홍글씨를 자신의 아이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지만 평사리를 떠나지 않는 이상은 절대 지워지지 않을 만큼 마을 사람들에겐 각인이 되어있어요. 한복의 아들 영호는 광주학생 운동에 영향을 받아 진주에서도 들불처럼 번진 학생운동의 주모자로 경찰에 연행되어 갔습니다.

 

p 67 이놈아! 머리빡에 피도 안 마른 주제에 머가 잘났다고, 남 하는 대로만 할 일이지 앞장은 와 섰노. 니가 그런다고 만 사람의 지도자가 될 기가. 니는 샐인죄인의 자손 아이가. 이놈아, 니는 남의 눈에도 띄지 않게 조신스리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말이다. 잘난 체할기이 아니라, 못난 체해도 돌멩이가 날아온다.

 

가급적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살기를 바라는 한복은 아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종용했겠지요. 왜냐하면 절대 떨어지지 않을 살인죄인의 후손이라는 꼬리표가 가만히 있어도 펄럭펄럭 하는데 학생운동에 앞장섰으니 그 꼬리표는 만천하게 드러나기에 그랬을겁니다. 그런데 영호에게도 한복에게도 샐인죄인의 자손이다 하며 침 뱉고 악담을 하던 봉기노인을 비롯하여 마을 사람들은 영호를 영웅 대접합니다. 덩달아 한복이는 갑자기 신분 상승을 하게 되었어요.

 

p 77 마을에서 김영호는 영웅이 되었다. 한복은 영웅의 부친이 된 것이다. 음지같이 빛 잃은 무반의 후예로서 그나마 영락하여 시정잡배와 다를 바 없었던 김의관댁, 중인출신의 조모와 살인죄인의 조부, 동네 머슴이던 부친과 거렁뱅이였던 모친, 그런 가계의 김영호가 지금 희망의 대상으로 부상된 것이다.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참 간사하다 싶어요. 질시하고 혐오할 때는 언제고 이제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들을 영웅대접 하니 말입니다. 농사꾼이 대부분인 평사리에서 학교를 다니며 공부를 하고 그 공부한 것을 나라를 되찾는 데 쏟아 붓는 청춘들이 그들에겐 무엇보다 가장 강력한 꿈이지 않을까 싶어요. 늙고 힘없는 사람들, 문맹에 가까운 사람들에겐 나라 잃은 슬픔보다 하루 배곯지 않는 것이 큰 위안이지만 못 배우고 힘없다 한들 나라를 되찾는 열망이 왜 없었겠어요. 다만 그들은 앞에 나설 용기와 배짱이 없을 뿐이겠지요. 그 용기와 배짱은 배움에서 오는 것이라 믿고, 그런 학생들이 앞장서니 다시금 내 나라를 찾을 희망이 보여 살인죄인의 자손이라도 쉽게 영웅의 자리를 내어주나 봅니다.

 

한편 조용하와 사랑 없는 결혼을 이어가던 명희는 고통스럽게 이혼을 하게 됩니다. 귀족 집안과 중인 역관 집안의 결혼은 애시 당초 이어질 수 없는 것이었는데요. 조용하가 동생 찬하가 사랑하는 명희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부인에게 거금의 위자료까지 줘가며 이혼을 하고 재혼 상대로 명희를 맞았어요. 부잣집에 시집가서 뭇사람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명희였지만 시동생과의 사이를 항상 의심하는 남편 때문에 겉과 속이 다른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이혼을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수에 사는 친구 여옥을 만나러 가다 통영에서 명희는 투신자살을 시도해요. 아무것도 창조해내지 못하는 삶을 산 자신에 대한 절망감과 악몽 같았던 결혼 생활, 그 나쁜 꿈과도 같은 삶을 끝내고 싶어 뛰어든 바다였는데, 운 좋게 구조가 됩니다. 명희는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났어요. 자신을 사랑하게 되고 뭔가를 창조할 의지가 보입니다.

 

p 482 새벽에 나를 건져준 어부의 아내가 쑤어온 미음 맛이 지금도 혀끝에 남아 있는 것 같아. 그것은 맛이었어. 맛이란 참 상쾌하더구먼. 그리고 또 부산에서 통영까지 올 동안 난 멀미를 안했거든. 그건 무슨 뜻 인고 하니 새삼스럽게 뱃멀미를 할 필요가 없었지. 멀미는 언제나 나랑 함께 있었으니까. 그랬는데 통영서 여수까지 오는 동안 멀미를 지독하게 하지 않았겠어? 또 있는 것 같다. 아까 이제부터 넌 사람이 된 거다, 그런 말을 했지? 그랬는지도 몰라. 가려야 하고 싸안아야 할 것이 없다. 그건 참 홀가분한 일일 거야. 아무 곳에나 갈 수 있고 아무하고나 얘기할 수 있고 무슨 일이든 할 수 있고, 화분이 아닌 빗자루.

 

명희는 주체성을 찾았습니다. 박제된 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 된 거에요. 멀미는 눈으로 보는 것과 몸이 느끼는 것이 다를 때 오는 불일치 때문에 생긴다고 김영하 작가가 말했는데요. 명희에게 결혼 생활은 일종의 멀미 같은 거였겠죠. 귀족의 화려한 삶을 눈으로 보는 것과 후취로 들어가 의처증 남편과 사는 건 모순과도 같았을 거에요. 통영서 그간의 멀미 같은 삶과 작별하고 여수로 오며 진짜 멀미를 동반한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아 명희에게도 새 희망이 움트는 것 같아요.

 

주권을 잃은 나라도, 주홍글씨가 새겨진 자손도, 멀미를 시작한 이혼녀도 모두 희망으로 한걸음씩 가고 있습니다. 동 트기 전 가장 어둡다지만 해는 계속 동쪽으로 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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