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토지 14

꿈트리숲 2019. 7. 1. 07:01

제 앞만 쓸고 사는 것이 장부겠습니까

 

 

월요일은 토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긴 호흡으로 읽는 책이어서 그런지 반을 넘어온 토지가 14부에서는 좀 힘을 빼고 쉬는 느낌이 들어요. 그렇게 극적인 부분이랄까 긴박한 부분이 다른 편보다 적어서 '그 외 인물'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마음은 쓰이지만 굵직굵직한 사건과 많은 이야기를 가진 인물들에 좀 밀려났었던 관수 이야기인데요. 서희, 길상이, 용이, 월선이, 홍이 등 평사리의 인물들과 동고동락하며 시대를 힘들게 살아온 인물입니다. 토지 1부에서 조준구가 서희 재산을 차지하고 흉년에 자신에게 고분고분한 사람들에게만 곡식을 나눠줄 때 마을 장정들이 최참판댁을 쳐들어갔어요. 그때 관수도 길상의 친구로 함께 했었지요. 주변 인물일거라 생각했는데, 관수는 토지 4부에까지 이어지면서 확실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p 465 관수가 이 지점까지 온 것은 우연도 작심에서도 아니다. 동학당으로 죽음을 당한 장돌뱅이였던 아비, 김훈장을 따라 산에 들어간 사이 행방을 모르게 된 어미, 그리고 은신처에서 만나 부부로 맺어진 백정의 딸인 아내, 그 응어리가 여기까지 오게 했으며 또 앞으로 가야 할 길에는 아들 영광의 한이 짙게 서릴 것이다. 네 사람 중에 가장 많은 설움과 고통을 넘어온 송관수, 해서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다. 딸을 남겨두고 아들의 행방은 모른 채 떠나야 할 자신, 그는 마음속으로 오열하고 있는 것이다.

 

관수는 최참판댁을 습격했다는 이유는 산으로 숨어 들어가고, 그래서 의병이 되고 동학군이 되고 늘 쫓기고 도망다니는 신세가 됩니다. 그러다 백정의 사위가 되는데요. 본인은 백정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남들의 시선은 백정입니다. 자신은 물론이요 아내 아이들까지 백정으로 여기는게 요즘으로선 쉽게 수긍이 가지 않습니다. 신분의 위협을 받아 다시 떠돌아야 하기에 딸을 지리산 속 깊숙이 강쇠네 며느리로 보내고 마음 속 눈물로 그 처지를 씻어보려 합니다.

 

백정은 조선시대 최하 신분이나 마찬가지인데요. 1894년 고종 임금 때 법으로는 백정 신분이 해방되었었어요. 그러나 법과 달리 사람들의 인식은 그대로 존속되었지요. 일제 시대때도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 그대로 있었구요. 이에 백정들이 형평사를 조직해서 계급 해방운동을 하게 됩니다. 관수도 형평사 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항상 은신해야 하는 처지가 된거죠. 그냥 사람들이 수군수군 대는 정도가 아니라 관공서나 교육현장에서도 차별과 박해가 있었구요. 목욕탕이나 이발소 요리점 등 사람들이 출입하는 곳에서도 차별이 행해지고 있었다니 내 땅 내 나라에서 일본의 억압보다 같은 조선인의 차별이 더 숨을 못 쉬게 만들었습니다.

 

관수의 아들 영광은 학교를 다니며 같은 학교 다니는 아이와 편지를 주고 받았어요.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이 사람을 좋아해서 쓴 연애편지였을텐데요.

 

p 49 그들은 양가의 부모 몰래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던 것이다. 혜숙이 집에서 그 일을 먼저 알았고, 그것까지는 좋았는데 어떻게 해서 밝혀지게 되었는지 백정의 외손자라는 것이 탄로되어 일이 크게 벌여졌던 것이다. 관수는 신변에 위험을 느끼게 되었으며 영광은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강혜숙이 사는 곳은 뛰어넘을 담조차 없는 철벽인 것을 영광은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자랑스러웠던 그의 청춘은 산산조각이 났다. 크나큰 충격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에 대한 증오심으로 변해갔던 것이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백정도 아니요 백정의 외손자여서 퇴학이라니요. 정의를 가르치는 학교에서 신분에 대한 차별이 공공연하게 행해지고 있으니 백정들이 형평사를 조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거에요. 나도 살아야겠지만 내 자식들을 위해서 위험을 무릅쓰고 일어났던 게 아닐까 싶어요. 계급 해방과 더불어 민족 해방을 해야만 하는 시대적 불운을 타고 난 때문에 조선 사람도 피해 다녀야 하고, 일본 순사도 피해 다니는 이중고가 이들을 더욱 더 산으로 산으로 숨게 만들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변화하는 시대를 맞는 사람보다 의병으로 동학군으로 형평사 운동으로 다음에는 독립투사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해가는 관수야 말로 정말 사내장부라 할 수 있겠어요.

 

p 179 “제 앞만 쓸고 사는 것이 장부겠습니까. 많은 사람을 위하여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것이 장부의 마음이라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서희가 아들 윤국에게 여기저기 마음 쓴다며 장부가 그리 나약해서 어쩌냐고 한 말에 윤국이 한 대사입니다.

 

관수는 제 앞가림만 하는 졸장부가 아니었습니다. 가족을 위해 마을을 위해, 신분제 차별 철폐를 위해 그리고 내 나라 독립을 위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마음을 가진 장부였어요. 가장 연약한 신분의 물 같은 존재지만 그 물을 담는 그릇이 달라지면 모양도 달라지고 쓰임도 달라집니다. 또 작은 물줄기도 모이면 거센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다는 건 이제까지의 역사를 통해 우리는 배워왔어요. 그 역사가 관수의 한을 풀어주면 좋겠다 싶어요. 관수의 뜨거운 눈물이 더는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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