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토지 17

꿈트리숲 2019. 7. 22. 06:20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

 

 

오늘은 토지 5부의 2, 17권의 얘기로 시작합니다. 189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토지가 1940년을 넘어 이제 광복이 머지않았어요. 짧은 책(사실은 大河라고 할 만큼 어마어마한 분량)에 그 치욕과 슬픔의 역사를 다 싣는 다는 건 무리일거에요.

 

역사에 기록된 일들은 굵직굵직한 일들이기에 혁명가, 운동가가 아닌 평범한 민중들의 삶은 이런 소설이 아니면 어디서 만나볼 수 있을까 싶네요. 물론 소설의 내용이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겠지만 대부분 그 시대를 반영하고 있어서 당시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 잘 알 수 있어요.

 

유인실과 오가타 얘기가 역사책에서는 볼 수 없는 인물들 얘기일 듯한데요. 국경을 초월한 한일간의 사랑. 지금 같아선 아름다운 얘기로 비춰질 수 있지만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결코 환영받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일본인과 같이 사는 여성은 그 당시 대부분 정부(情婦)나 첩이었어요. 그래서 손가락질 받으며 욕을 들어가며 사람대접 못 받았고 살았지요. 그러니 일본인과 결혼 한다는 것은 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현실을 잘 알기에 인실은 오가타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인실은 명희의 제자로 동경 유학을 한 지식인입니다. 동경 유학 당시 관동 대지진이 났었고, 그 지진의 여파로 화재가 발생하고 수많은 인명이 목숨을 잃었어요. 그때 조선인들이 방화를 했다,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가 나돌아 일본인들에 의해 조선인들이 학살당하는 비극이 일어났었죠.

 

그 당시 오가타가 유인실을 비롯한 동경 유학생들을 무사히 대피시켜 주고 조선으로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줍니다. 오가타는 이미 인실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었던거죠. 그 후에 두 사람의 인연은 계속되지만 인실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이다, 그리고 이루어져서도 안 된다는 완강한 뜻을 밝힙니다. 서로의 입장을 너무나 잘 아는 둘은 팽팽한 사랑의 끈을 잡고 있습니다.

 

p 264 도망치면서 다가가는 마음, 뿌리치면서 매달리는 마음.

 

네 바로 그런 마음 아니었을까요? 조선과 일본이라는 나라를 떠나 여자와 남자, 그 순수한 사랑은 서로를  쉽사리 당기지도 그렇다고 놓치도  않아요. 시대가 낳은 또 하나의 비극입니다. 인실은 오가타와 하룻밤을 보내고 잠적해버려요.

 

p 183 “저는 그분한테 생명보다 중한 것을 주었습니다. 더 이상 나는 줄 것이 없어요.”

 

이런 말을 남기고서요. 대부분 이런 말을 들으면 순결을 주었다는 뜻으로 해석을 하는데요. 저도 처음엔 그럴 줄 알았어요. 왜 인실은 그냥 오가타와 사랑의 도피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냥 일본에서 오가타와 결혼을 해도 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해봤어요. 인실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인실에게는 생명보다 중한 것, 조국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거에요.

 

그래서 오가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신에게는 무엇보다도 견딜 수 없는 슬픔이자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큰 배신이었던 겁니다. 그것은 조국과 내 겨레를 배신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런 마음을 알길 없는 오가타는 인실을 백방으로 찾아보지만 헛수고에 그치고, 그 사이 인실은 찬하의 도움으로 아이를 낳아요. 그 아이는 찬하가 입양하여 친부모 못지않은 사랑 속에서 잘 자랍니다.

 

십 여 년이 흘러 인실과 오가타는 진실을 마주하며 서로를 향한 변하지 않는 마음을 확인하게 돼요. 그러나 또 하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그들은 현실을 바꾸려 어설프게 덤비지 않습니다. 인실은 진실만 전했을 뿐 여전히 독립운동가로 남고, 생각지 못한 아들을 알게 된 오가타는 여전히 유랑하는 일본인으로 남습니다. 찬하가 키우는 자신의 아들을 새삼 데려온다는 건 그 아이를 위해서 결코 좋은 결정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인데요.

 

p 271 "모든 사람은 다 나름대로 철학자 아닐까? 자기 인생을 그 자신만큼 진지하게 철저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해답을 얻기도 하고 얻지 못하기도 하고, 돌이킬 수 없는 나이가 돼서야 비로소 깨닫기도 하고"(중략)

 

영광이 우연히 들른 술집의 마담이 이런 말을 했어요. 모든 사람은 다 나름대로 자기 인생의 철학자라고요. 인실과 오가타는 각자가 자신의 인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했을까 생각이 들어요. 더군다나 인실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를 버리는 비정한 행동까지 하면서요. 아마 자신의 모든 인생을 걸고 고뇌하지 않았을까요?

 

그 해답을 얻지 못해도 앞으로는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이고 인생인가 봅니다. 나이가 들어 아! 하고 대오각성 하며 번뇌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평안해지는 것, 우리 모두 그런 철학자가 아닐까 싶어요. 오가타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잠적한 인실을 찾아 조선을 일본을 중국을 유랑하면서 자신의 인생에 대한 생각 숱하게 했겠지요. 찬하 집에 들를때마다 철저히 찬하의 아들인줄로만 알고 대했던 자신의 아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 같기도 한데요. 돌이킬 수 없는 나이가 되었기에 그는 깨닫습니다. 그리고 현명한 처사를 내리죠. 찬하의 아들로 계속 자라도록요.

 

앞선 세대에서 잘한 판단이든 잘못된 결정이든 뒷 세대들은 어떻게든 꾸려나갑니다. 그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현실과 치열하게 싸워가면서요. 자기인생의 철학자들은 여명을 맞을 준비를 계속해 나가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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