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토지 18

꿈트리숲 2019. 7. 29. 06:22

자손의 핏줄을 타고 돌게 되는 나의 모든 것

 

 

토지에는 남녀간의 사랑 보다는 등장인물들이 시국을 한탄하고 앞으로의 일들에 저마다의 생각을 얘기하는 것이 종종 나옵니다. 남녀간의 애틋한 사랑은 스쳐가는 바람처럼 왔다가 금방 사라지는 정도지요.

 

때로는 애욕에 사로잡혀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의 포로가 되는 장면도 심심찮게 그려지는데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전 생각합니다. 누군가를 가지고 싶다는 소유욕일 뿐이지요. 대부분 힘으로 또는 신분을 이용해 주로 남자가 여자에 대해 욕심을 부립니다. 여자와 노비는 주권이 없는 시대라 이해는 하지만 그런 장면이 나올때마다 참 씁쓸했어요.

 

양현이는 이상현과 기화 사이에 난 딸인데요. 양반 가문의 핏줄을 절반은 타고났기에 상현이 집에서 양현이를 호적상 딸로 받아들입니다. 서희가 애지중지 길러 여의사까지 되었으나 양현은 자신의 절반인 기생이자 침모의 딸인 봉순의 핏줄 때문에 고뇌합니다. 혹시나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출생 때문에 동병상련 되는 것 아닌가 하구요.

 

p 254 ‘영광오빠하고 내 운명은 비슷하다. 영광오빠가 결혼 안 하는 것도, 내가 결혼이라는 것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도, 우린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들 운명에 따라다니는 그 출생이라는 괴물. 그것 때문일 거야.’ -토지 17권의 내용 중-

 

영광이는 송관수의 아들이면서 외할아버지가 백정이죠. 그래서 학교에서 연애편지 주고받았다는 표면적 이유로, 백정의 외손자라는 실질적 이유로  퇴학을 당했어요. 양현은 영광과 자신이 같은 슬픔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기생의 딸, 백정의 손자. 신분제가 철폐되었지만 여전히 그 시대 사람들에겐 꿈을 주저앉히고 사랑을 옭아매는 강력한 그 무엇인 것 같아요.

 

핏줄이 무엇이기에 생명을 준 부모, 그 부모의 부모, 가문까지도 핏줄을 통해 이어집니다. 조상의 신분과 업적을 핏줄을 통해 공급받는 것 같아요. 내 몸 구석구석 피가 돌 듯 조상들의 과오는 내 몸과 정신을 지배합니다. 그렇기에 양현이, 영광이, 조준구의 아들 병수, 김평산의 아들 한복이 등 시대와 부모를 잘못 만난 탓에 한없이 괴로워하고 눈물짓게 되네요.

 

p 263 “나는 공주를 얻기 위해 결투장에 나갈 수 있는 기사가 아니야.”

 

영광의 이 말은 어느 한쪽이든 양반의 피를 이어받은 양현과 온전히 상민의 자손인 자신과는 결코 같아질 수 없다는 말로 들려요. 그리고 공주를 얻기 위한 최소한의 자격조차도 없다는 뜻 같기도 하구요. 그만큼 신분은 강력한 무기입니다. 그 무기가 없어진지 오래되었건만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아직 남아있는 것 같아 개운하지가 않네요. 돈으로 만들어진 보이지 않는 계급은 그 시절 신분제처럼 음으로 양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져요. 조상들의 목숨값으로 쟁취한 결과물을 우리는 잘 계승하지 못하고 과거로 다시 회귀하는 건 아니겠죠?

 

토지가 거의 끝에 이르면서 부모 세대가 대부분 저물고 있습니다. 조준구도 욕심으로 점철된 생을 마감했는데요. 과연 그의 삶이 순수했던 적이 있었던가 싶게 마지막 죽는 순간까지도 온전한 자신을 찾지 못하고 아들을 괴롭히고 떠납니다.

 

p 176 눈을 부릅뜨고 죽은 조준구의 형상은 끔찍했다.

끔찍했을 뿐만 아니라 삶의 기능, 존재했던 육체의 마지막 한 오리 한 방울까지 훑어내고 짜내버린 종말의 모습은 너무나 처참했고 머리끝이 치솟는 것 같은 공포감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깊은 연민을 느끼게 했다. 생명에 대한,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연민이었다.

 

자신의 죽음이 이렇게 처참할 것을 예상했다면 사는 동안 덜 욕심 부리고 더 베풀면서 살지 않았을까 싶어요. 한치 앞도 모르는 것이 인생이라고는 하지만 욕심은 한도 끝도 없다는 것, 그리고 종래에는 끌어 모은 것들을 한줌도 가져갈 수 없다는 것쯤은 당연히 아는 상식이었을텐데. 생이 끝나기 전에는 그 종말이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가 봅니다. 어쨌든 많은 원망과 한을 뿌렸던 부모 세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p 179 ‘이제는 끝이다!’

이제는 끝난 거다!’

자손으로 하여금 그들 조부들 죄의 핏자국을 닦게 하기, 씻게 하기 위하여 모든 우연이 있었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병수도 한복이도 그들 조부의 죄를 닦고 씻어냈어요. 시대와 인심이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부모의 면죄부를 주었을 것이라 짐작합니다. 오늘을 사는 저는 내일을 살게 될 아이의 빛나는 거울이 되어야겠다, 아이의 핏줄을 타고 돌게 될 아름답고 강인한 정신을 수혈해야겠다 생각이 드네요.



728x90

'배움 >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토지 20  (21) 2019.08.12
토지 19  (16) 2019.08.05
토지 17  (16) 2019.07.22
토지 16  (10) 2019.07.15
토지 15  (11) 2019.07.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