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

꿈트리숲 2019. 9. 4. 07:28

아픔의 연대

 

 

저의 독서 지평을 새롭게 넓혀준 책이 있습니다. 김승섭 저자의 <아픔이 길이 되려면>인데요. 사회역학에 대해서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던 것이 명징해진 느낌을 갖게 해준 책입니다. 사회역학은 질병의 사회적 원인을 찾고, 부조리한 사회구조를 바꿔 사람들이 더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학문이라고 합니다.

 

저자는 아픔을 연구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아프다고 큰 소리치는 사람의 그것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아픔, 하지만 우리가 꼭 치유해야만 하는 아픔이에요. 한 개인, 한 집단의 아픔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사회와 관계있기에 건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아픔을 누군가는 들어야 하고 또 치유해야 되는 것이죠.

 

p 12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시간이 새겨집니다.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들 중에 저에겐 낯선 사실들이 많았는데요. 그 중 하나가 성인이 되어도 태아의 경험이 몸에 남겨진다는 거였습니다. 혹독한 기근에 시달린 지역, 전쟁으로 고립된 지역들의 예를 책에서 만나볼 수가 있었어요. 어머니의 배 속에 있는 태아나 막 태어난 아이가 굶주린 경험이 몸에 남겨져 당뇨병이나 우울증, 심장병등의 원인이 된다는 연구결과가 놀랍더라구요.

 

사람은 사회와 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개인의 건강과 사회의 건강은 상호 긴밀하게 주고받는다 생각이 듭니다.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들어있는 것처럼 인간의 몸에는 사회의 시간과 흔적이 고스란히 남기 때문이겠지요.

 

책을 보면서 저의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수많은 사회의 약자들이 있음에 놀랐고요. 그리고 그 약자들의 아픔을 돌보고 치유하는 사람들이 소수이긴 하지만 있다는 것에 또 한번 놀랐습니다. 관심을 갖지 못한 제 자신이 부끄럽기도 하네요.

 

저자는 자신의 배움을 아픔을 가진 이들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저자 소개부분을 읽고서 어떻게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 궁금해졌는데요. 그래서 저자 소개란을 꼼꼼히 읽어봤습니다.

 

사회역학자로서, 차별 경험과 고용불안 같은 사회적 요인이 결혼이주여성이나 비정규직 노동자, 성소수자와 같은 사회적 약자의 건강을 어떻게 해치는지를 주로 연구하고 있다. (중략) 환자를 치료하는 것만큼 사람들이 아프지 않도록 예방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이 자기 삶에 긍지를 갖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중략)’ 부분에 저자가 참여한 연구들이 많이 들어있는데요. 인턴/레지던트 근무 환경 연구,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건강 연구, 소방공무원의 인권사항 실태조사, 한국 성인 동성애자/양성애자 건강 연구, 단원고 학생 생존자 및 가족 대상 실태조사 연구, 트랜스젠더 건강 연구 등 다 나열하기도 벅찬 연구들입니다.

 

연구의 수도 많지만 참여했던 연구 하나하나가 사회 약자의 이야기를 듣는 연구입니다. 한 두건의 연구가 아니라 이쯤되면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돕는 것이 이분의 성격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p 301 ‘어린 시절 특별히 정의롭지도 또 용감하지도 않던 내가 어쩌다가 지금처럼 사람에 대한 꿈을 꾸고 이렇게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묻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의대 본과 1학년 때 산업재해를 당한 분들이 모인 사무실에서 한 달 동안 자원상근을 한 적이 있대요. 어느 날 기타 치면서 함께 노래를 부르는데 손가락 열 개가 온전히 있는 사람이 저자 본인 뿐이었다고 합니다. 첫 경험이 강렬했던 것일까요? 저자를 약자의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대신 말해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든 것 같아요. 같은 경험을 해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들 편에 서서 목소리를 대변해주는 저자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었으리라 짐작합니다.

 

아픔은 한 개인에게만 머물기도 하고, 한 시대에 국한되기도 합니다. 시대가 같이 겪는 아픔이래도 그 아픔을 느끼는 개인은 무리에서 떨어진 섬처럼 느낄 경우가 많아요. 내가 못나서 그렇지, 내가 부족해서 그렇지 하면서 점점 더 고립무원이 되어가곤 하죠. 이 책의 제목처럼 아픔이 길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생각을 해봤어요. 아픔을 경험하는 개인은 여기저기 흩어진 점 같은 존재라 생각하면 그 점을 이으면 선이 될 것이고, 그 선은 자연스레 길이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 점을 잇는 역할,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는 역할을 김승섭 저자가 하고 있었다 느꼈습니다. 아픔을 연구해서 그 원인이 사회에 있음을 알리고, 또 다시 그런 아픔이 나오지 않도록 혹은 아픔을 겪는다 하더라도 건강하게 나아갈 길이 있음을 알려주는 역할말이죠. 그 길에 저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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