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진이, 지니

꿈트리숲 2019. 10. 2. 07:01

운명이 명령한다. 전력으로 살아라고.

 

 

올해 읽은 책들을 쭉 훑어보니 전에 없이 소설책이 눈에 띕니다. 대학 졸업 이후엔 소설책을 거의 보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메마른 감성에 경고등 켜지기라도 한 듯 <토지>를 필두로 최근의 <회색 인간>까지 소설을 많이 읽었습니다.

 

그래서 이 소설은 읽지 말까, 아니면 한참 후에나 읽을까 생각하고 있었어요. <진이, 지니>. 아이가 보고 싶다고 해서 교보문고 털기 하며 건져온 책이었죠. 감성 충만 십 대여서 그런지 결말에 눈물을 흘리며 책의 별점을 간접 표현하던 딸. “엄마 이거 꼭 봐, 아니 봐야 해.”

 

늘 자기가 추천해주는 책은 엄마가 아예 안 보거나 한참 후에 본다고(아몬드의 경우도 1년쯤 지나고 봤어요) 투덜대는 딸이기에 앞에 몇 장만 슬쩍 보고 읽은 척 좀 하려고 했습니다. 프롤로그 몇 장 읽고 빠져야지 했는데, 이야기 속으로 빠져버려서 단숨에 끝까지 보게 됐어요. 몰입감이 최고라고 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아이가 왜 꼭 보라고 했는지, 왜 눈물로 별점을 대신 했는지 그냥 알 것만 같았어요. 주인공 단 세 사람, 아니 세 생명체로만 이야기를 꾸려도 이렇게 폭넓은 세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이 놀랍기도 하고 작가의 능력은 이런 것이구나 온 세포가 느끼며 지금도 감동 중입니다.

 

모퉁이를 돌면 지금보다 나은 무언가가 있다고 믿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찾아간 곳.

쓰레기 취급받으며 더이상 살 이유가 없어 이겨내고 견뎌내기를 포기하기 위해 찾아간 곳.

아무런 이유 없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누군가에 이끌려 가게 된 곳.

 

그곳 무곡에서 인류와 영장류는 만나게 됩니다. 서로의 영혼은 알아봤던지 지니의 몸과 진이의 영혼 그리고 민주의 몸과 마음은 운명의 터널로 한날한시에 빨려 들어가요. 그 누구도 원하지 않았던 방향의 운명은 영혼과 몸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영혼과 몸을 위해 적극 나설 수 있도록 가혹하지만 압박을 가합니다.

 

평생 괜히 뭔가 하려 들지마, 그냥 가만있어라는 말을 금언처럼 여겨온 민주에게는 타인의 운명에 휩쓸리게 된 것이 귀찮을 법도 한데요. 그래도 다정한 그녀를 위해서 자신의 평생 금언을 깨고 운명의 터널에서 전력 질주를 합니다.

 

p 293 삶은 살아 있는 자의 것이며, 살아 있는 동안 전력으로 살아야 한다고. 살아 있는 한, 삶을 선택하는 것이 옳다고.

 

여자 사람 진이, 남자 사람 민주, 그리고 보노보 지니. 이들은 살아 있는 동안 삶을 선택합니다. 전심전력으로 살아내고 있어요. 같은 운명에 엮이어 있지만 삶의 방식은 각기 다르게. 살고자 했던 이는 죽음을 택하고, 죽고자 했던 이는 삶을 선택하며 내 의지와 상관없이 끌려갔던 이는 타인의 의지로 원래의 삶으로 돌아갑니다.

 

삶과 죽음이 경계를 두고 뒤바껴 돌아가는 것 같은데요. 저는 삶과 죽음, 그 경계가 어디인지 어떤 것인지는 모르지만 분명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이 책에서는 삶과 죽음은 같은거라 얘기를 합니다.

 

p 367 그녀는 내게 삶이 죽음의 반대말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삶은 유예된 죽음이라는 진실을 일깨웠다. 내게 허락된 잠깐의 시간이 지나면, 내가 존재하지 않는 영원의 시간이 온다는 걸 가르쳤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나는 살아야 할 것이다. 그것이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이었다.

 

삶은 사람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 생각해요. 우리가 의식을 가지고 우리 삶을 선택하듯 본능일지언정 동물들도 자신의 삶을 살아갑니다. 더구나 인간과 가장 유사한(98.7%) DNA를 가진 보노보는 두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그들에게도 기쁨과 슬픔이 있고 분노와 절망이 있다는 걸 영혼의 단짝 진이가 알려주지 않았다면 몰랐을까요? 어쩌면 우리는 알고 있는데 애써 외면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보노보 앞에서 내가 사람이라는 것이 한없이 미안해지지만 그때가 오기 전까지 삶을 가진 자에게 내려진 운명의 명령을 잘 수행하는 수밖에 없다 싶어요. 운명의 명령은 뭘까요? 살아 있는 모든 생명체의 삶은 나와 똑같은 삶이라는 걸 아는게 아닐까 생각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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