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시작합니다, 비폭력대화>에서 다양한 감정 어휘를 소개했었는데요. 제가 미처 모르고 살아왔던 감정 어휘가 많아서 깜짝 놀랐었어요. 감정 어휘를 알게 되어서 가려운 곳 시원하게 긁었다 생각했죠.
그러다 이내 다른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겁니다. 감정 어휘는 알았는데, 어떨 때 어떤 기분일 때 저런 말을 쓸까 하고요.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 되고는 싶은데, 감정과 어휘를 연결짓지 못해 그런 사람 되는 게 살짝 버퍼링 걸리는 기분이 들었어요.
시인들은 감탄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어느 시인이 얘기를 해줬는데요. 감탄이라는 건 기쁨에도 온몸의 세포가 반응할뿐더러, 슬픔이나 놀람 두려움 절망 같은 것에도 감정의 촉수가 예민하게 발동한다고 전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다양한 감정을 멋진 어휘를 동원해 감동주는 시로 탄생시키는 게 아닐까 하고요.
감정의 어휘 일일이 사전 찾아서 그 정의를 알아내고 예시 상황을 숙지하는 것, 도움은 되겠지만 바쁜 시대 그런 품을 들이기가 살짝 피곤하고 부담스러워서 전 그냥 넘어가기로 했는데요. 그런데 그냥 넘어가려는 저를 붙잡아 세우는 책을 만났습니다.
매주 한번 가는 그림 수업에서 요즘은 갖가지 감정을 그리고 있어요.
감정은 이런 게 있다며 선생님께서 참고하라고 책을 한 권 보여주셨는데 그림이 너무 예뻐서 책을 빌려왔어요. 집에서 찬찬히 읽다가 감정 어휘에 대한 궁금증, 앞선 책에서 제가 느꼈던 물음표에 대한 답을 찾는 기분이 들더라고요.
<아홉 살 마음 사전>은 우리의 다양한 감정 중 80가지(무려 80가지에요. 헉!)를 아홉 살의 시선에서 설명하고 그림으로 표현한 책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 어휘를 쓸 수 있는 상황들을 예시로 들어놔서 이 책 한 권이면 아홉 살 뿐만 아니라 마흔 둥이 쉰 둥이도 너끈하게 감정 수업이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어릴 때부터 감정 어휘를 숙지하고 몸으로 느꼈다면 삶이 좀 덜 피곤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나의 기분에 대해서도 명확히 알고 타인의 감정도 잘 읽어줄 수 있을 테니까요.
감정의 촉수를 벼리지 못한 채로 나이만 먹다 보니 감정이 점점 무뎌지는 것을 느낍니다.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거나 특별히 좋은 것도 특별히 나쁜 것도 없는 무덤덤이 거의 주를 이루지요.
상큼하다는 말 언제 자주 사용하세요? 전 의식하고 써야지 해서 쓰는 것 외에는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요. 그것도 주로 과일 먹을 때나 썼었죠. 친구의 머리 스타일 예쁘게 된 것 보고 해줄 수 있는 말, 상!큼!해! 기억해두겠습니다.
‘상큼하다’ 사전적으로 다른 뜻도 있는데요. 이 책에서 설명하는 뜻은 ‘보기에 시원스럽고 좋다’입니다. 지인을 만났을 때 머리를 시원스레 예쁘게 하고 나왔다면 앞으로 상큼하다는 칭찬을 해줘야 겠습니다.
‘달콤하다’ 역시 전 음식 맛 표현할 때만 주로 썼었는데요. ‘편안하고 포근하다’는 뜻도 있어서 마음이 몽글몽글한 순간, 혹은 꿈만 같은 상황에 쓰면 좋을 것 같아요. 추운 겨울 방안에서 담요 덮고 귤이랑 군고구마 까먹는 시간, 저에겐 달콤한 시간입니다.
최근에 찡하다고 느낀 적 있으신가요? '찡하다' 는 '눈물이 나올 만큼 뭉클하다' 인데요. 전 아침 설거지를 할 때면 추억의 팝송을 들으며 하는데요. 학창 시절 주구장창 들었던 그 음악들의 전주만 들어도 저는 코끝이 찡해옵니다. 즐거웠던 설렜던 순간들이 온몸에 피를 타고 도는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지금은 비록 설렘의 촉이 무뎌졌지만 음악 듣는 것으로 찡한 순간을 소환해 설렘을 예민하게 갈고 닦아보려 합니다.
언어는 생각의 집이라는 말이 있어요. 말보다 생각이 중요한 것 같지만 언어가 없다면 생각을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생각 자체도 언어가 연결되어야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아홉 살 마음 사전에는 이처럼 다양하고 다채로운 감정이 들어가 있는데 마흔 살(실은 마흔 일곱) 마음 사전에는... 사전이 빈약하다 못해 아주 홀쭉한 상태인데요. 생각을 담을 튼튼한 집, 나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해 줄 다양한 집이 있다면 슬기로운 감정생활 문제없을 것 같아요. 감정 표현 사전으로 아이에게 멋진 생각의 집 한 채 선물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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