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일득록

꿈트리숲 2020. 6. 22. 06:00

 

 

10년쯤 된 것 같은데요, 이지성 작가의 <리딩으로 리드하라>를 읽고 알게 된 <일득록>을 10년이 훌쩍 지나 <한중록>을 읽고 별안간 정조대왕의 어록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인문고전 50권 도전하면서 <명상록>을 소개한 바 있어요. <명상록>은 로마 16대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어록이지요. 로마 왕의 어록은 읽으면서 우리나라 왕들의 어록은 한 번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반성을 좀 하면서 <일득록> 후기 시작합니다. 뭔가 깨알 같은 글씨로 노안이 온 저의 눈을 강타할 것 같았지만 예상을 깨고 글씨 크기나 편집, 그리고 내용도 요즘 스타일에 맞게 편찬된 것 같아서 맘에 들었어요.

 

<일득록>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건 정조대왕의 이름인데요. 드라마 제목에도 있었다시피 우리는 정조대왕의 이름을 ‘이산’이라고 알고 있죠. 한자로는 ‘李祘’으로 씁니다. 여기서 ‘祘’자가 ‘수를 셈하다’는 뜻의 ‘산’자 인데요. 정조임금 생전에는 ‘祘’의 음을 ‘셩’이라고 읽었다는군요. ‘祘’자의 의미는 ‘밝게 살펴서 헤아린다’, ‘살피다(省)’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해요.

 

그래서일까요? <일득록> 곳곳에는 정조대왕이 백성의 처지를 두루 살피고 헤아리는 마음, 자나 깨나 왕으로의 의무와 책임을 저버리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피는 태도가 듬뿍 담겨 있습니다.

 

<일득록>은 신하들의 눈에 비친 정조의 언행을 기록한 것인데요. 규장각 신하들이 평소 보고 들은 걸 기록해뒀다가 연말에 모아서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정조는 이 책을 편집하게 한 의도를 아래와 같이 밝히고 있습니다.

 

“이것은 반성의 자료로 삼기 위한 것이며, 또한 그 기록을 통해 신료들의 문장과 논의도 살펴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지금 만약 지나치게 좋은 점만 강조하여 포장하려 한다면, 그저 덕을 칭송하는 하나의 글이 될 뿐이니, 어찌 내가 이 책을 편집하게 한 본뜻을 어긴 정도일 뿐이겠으며, 뒷날 이 책을 보는 이들이 지금 이 시대를 어떻다 할 것이며, 규장각 신료들은 또 어떻다 하겠는가? 이러한 의미를 규장각 신하들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다. (10쪽)

 

이름 그대로 ‘祘(셩)’, 살피는 마음이 가득하죠.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게 해서 반성의 자료로 삼으려는 군주가 얼마나 되었을까요? 후대에 길이 이름이 남는 왕은 사소한 태도 하나에서부터 여느 왕과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일은 백성을 사랑하는 데서 벗어나지 않는다. (163쪽)

 

정조임금은 세종대왕에 이어 조선 임금 중 가장 열혈 독서를 한 군주일 텐데요. 책 자체를 사랑한 것도 있겠지만 폭넓은 독서를 통해 올바른 정치를 하는 것이 목표였을 거예요. 올바른 정치가 백성을 편안하게 해줄 것이라 믿은 때문일 겁니다.

 

임금이 백성 아니면 누구와 나라를 다스리겠는가? 그래서 ‘임금은 백성을 하늘로 여긴다’하는 것이다. 백성은 먹을 것이 아니면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백성은 먹을 것을 하늘로 여긴다’하는 것이다. 진실로 나의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의 하늘을 소중히 여긴다면, 백록(많은복)을 자임하고 영명(오랜 수명)을 비는 것이, 실로 여기에 기초할 것이다. (196쪽)

 

‘백성이 배고프면 나도 배고프고, 백성이 배부르면 나도 배부르다’고 할 정도로 백성의 안위를 무엇보다 중하게 생각했던 정조. 정조임금은 자신의 호를 스스로 지었습니다. ‘홍재 탕탕평평실 만천명월주인옹’이라고요. 전 ‘만천명월주인옹’에서 정조대왕의 삶의 목표가 느껴져서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만개의 시내에 비친 밝은 달의 주인 늙은이라는 뜻인데요. 하늘의 달은 하나지만 만개의 시내에 달이 비치면 달이 만개가 될 수 있음이죠. 임금의 관심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만백성에게 퍼지기를 바라는 염원 같기도 하더라고요.

 

산보다 더 높은 게 없고, 바다보다 더 넓은 게 없지만, 높은 것은 끝내 포용하는 게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바다는 산을 포용할 수 있어도, 산은 바다를 포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의 가슴속은 진실로 드넓어야지, 한결같이 높은 것만 추구해서는 안 된다. (31~32쪽)

 

그리고 바다는 산을 포용할 수 있다는 말에서 만인이 우러러보는 제일 높은 자리에 위치한 임금을 포용하는 진실로 넓은 사람이 곧 백성이라는 뜻 같기도 해서 또 한 번 감탄했습니다.

 

나를 포용해주는 백성을 위해 만 개의 시내에 더 밝은 빛을 비춰주고 또 기꺼이 나를 낮춰 그들의 눈높이에 맞추며 더 넓어지겠다는 결심이 보이는 정조대왕의 인생 철학에 고개가 절로 숙여집니다.

 

고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건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함도 있지만 고전과 역사가 바로 오늘의 스승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이렇듯 백성을 아끼고 사랑하는 임금이 있었음을 잊지 않고 오늘 우리는 누구를 위해 나를 낮추고 더 넓어져야 할지 생각해보게 하는 <일득록>이었습니다.

 

728x90

'배움 > 인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마커블 천로역정  (16) 2020.07.06
삼국유사  (10) 2020.06.29
한중록  (14) 2020.06.15
만화 사기열전 사기어록  (12) 2020.06.08
열하일기  (16) 2020.06.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