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일상

월동준비를 슬슬 할 때가 왔어요

꿈트리숲 2020. 11. 5. 06:00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어제 올 한해 읽었던 책들을 쭉 정리하면서 보니까 저는 가을 한가운데라고 할 수 있는 10월에 오히려 독서의 양이 제일 적었더라고요. 10월 한 달 뭐 한다고 책을 못 읽었지 하면서 지나간 그림일기를 들춰보았습니다.

 

치과 치료 다닌 날이 종종 있었고, 볼일 보러 외출도 잦았더라고요. 그리고 책 한 줄 읽고 한참 생각하고 한 페이지 읽고 책을 덮기도 해서 딴생각이 많았던 한 달이기도 했습니다.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다.

조금 차분해진 마음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볼 때, 푸른 하늘 아래서 시름시름 앓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볼 때, 산다는 게 뭘까 하고 문득 혼자서 중얼거릴 때, 나는 새삼스레 착해지려고 한다. 나뭇잎처럼 우리들의 마음도 엷은 우수에 물들어 간다.

가을은 그런 계절인 모양이다. 무소유 20쪽

 

가끔 법정 스님 말씀이 생각날 때면 누렇게 바랜 무소유를 만져보는데요. 툭 펼친 곳에서 가을은 참 이상한 계절이라는 문구가 눈에 밟혔어요. 이상한 계절, 나뭇잎이 물들 듯 저도 마음이 빨갛게 파랗게 물들어 딴생각이 많았나 봅니다. 며칠 전 산책하면서 나무에 겨울옷을 입혀주는 사람들을 봤어요. 저는 또 딴생각으로 빠졌습니다.

 

‘나무는 추운 겨울을 어떻게 나는 거지?’에서 시작한 생각은 ‘우리는 월동준비를 뭐로 하나’까지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습니다. 겨울이 되면 저는 이불 밖은 위험하다며 내복에 패딩을 껴입고 보일러를 풀가동하며 외출을 하지 않으려 하는데요. 나무는 한겨울 휘몰아치는 북풍을 한데서 어떻게 견디는지 예전에 읽었던 책을 찾아봤습니다.

 

눈 속에서 사는 식물들에게 겨울은 여행이다. 식물은 우리처럼 공간을 이동하면서 여행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식물은 장소를 이동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사건을 하나하나 경험하고 견뎌내면서 시간을 통한 여행을 한다. 그런 의미에서 겨울은 특히 긴 여행이다. 랩걸 274쪽

 

우와! 힘들고 괴로울 것만 같은 겨울이 나무에는 여행의 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견딘다는 표현보다는 기꺼이 받아들인다. 혹은 그 시간을 기다린다고도 할 수 있겠어요. 사람은 여행을 통해 성숙하고 성장하지요. 나무도 긴 겨울 여행을 하고 나면 성장하는 걸까요? <랩걸>의 저자 ‘호프 자런’은 나무는 겨울 여행 하는 동안 자라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아마도 우리처럼 내적 성숙을 하느라 그런가 봐요.

 

나무는 여행 준비를 어떻게 하는지도 궁금한데요. 우리는 캐리어에 먹을 것, 입을 것 바리바리 욱여넣는데, 나무는 비워내는 걸 선택합니다. ‘경화’라는 과정을 거치면서요. 순수 물은 빼고 세포 안에 당이나 단백질 산 등을 농축해서 부동액처럼 얼지 않게 만든다고 해요. 그러면 세포 안에 든 액체는 영하의 기온에도 얼지 않는다고 합니다. 줄기까지만 보존하고 나뭇잎은 과감히 떨구어 냅니다. 긴 여행일수록 더 단출하게 하는 거겠죠. 단풍이 알록달록 아름답게 물들었다는 건 나무가 서서히 수분을 차단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죠. 엄마 몸에서 곧 떨어져 나갈 단풍잎, 찬란한 서글픔입니다.

 

나무도 사람도 찬란한 젊음은 찰나에 지나지 않구나 싶습니다. 찰나의 순간을 영원으로 사는 방법, 어쩌면 나무는 알고 있을 것 같아요. 영원처럼 느껴지는 혹한을 여행의 시간으로 갖는 지혜를 가졌으니까요.

 

양서란 거울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책을 읽다가 자꾸 덮고 멈추게 한 구절을 통해서 나 자신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좋은 친구를 만나 즐거울 때처럼 시간 밖에서 온전히 쉴 수 있다. 무소유 19쪽 요약

 

책을 읽으면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립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말은 ‘가을도 독서의 계절이다’로 바꿔야 할 것 같아요. 가을보다는 오히려 겨울이 더 독서와 안성맞춤이거든요. 이불 속에서 귤 까먹으며 책 읽기. 군고구마, 호빵, 붕어빵 등 간식거리 풍부해서 독서가 더 정겹습니다. 겨울 여행, 저는 책으로 준비하려고요. 월동준비로 독서 어떠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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