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꿈트리숲 2020. 2. 13. 06:00

몇 해 전에 “행복한 고구마”라는 제목이 붙은 네 컷 만화를 본 적이 있어요. 고구마가 자신의 정체성을 알 길이 없으니 주위의 인삼들을 보며 파악하는 그림인데요. 그림이 재밌기도 하고 저의 최애 간식이 고구마이기도 해서 만화를 캡쳐 해서 소장했더랬죠. 작가가 누구인지, 만화의 출처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말이죠.

 

몇 달 전 블로그 이웃 아리님께서 도대체 작가의 <작가특보 : 뭐라고? 마감하느라 안 들렸어> 소개해주셨는데, 그 책에서 행복한 고구마와 비슷한 만화 그림이 보였어요. 드디어 행복한 고구마를 탄생시킨 분의 정체를 알게 되는 순간이었어요. 도대체 누가 그렸을까? 내내 궁금했는데, ‘도대체’ 작가가 그렸다니... 작가의 이름에서부터 유머와 개그감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도대체 작가의 책들을 검색해보다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책을 발견했어요. 제목이 마음에 쏙 들어서 찜했는데, '행복한 고구마'의 풀 스토리가 프롤로그에 소개되어 있어서 궁금증은 다운, 재미는 업되었습니다. 오늘에 와서보니 요 책도 아리님께서 리뷰를 올리셨더라고요. 아리님과 저 통한건가요? 

 

도대체 씨는 나의 오랜 트친이다. 나는 그녀를 지난 몇 년간 트위터상으로 밤에도 낮에도 이슬을 맞는 새벽에도 지켜봐 왔다. 내 트잉여 인생을 걸고 자신 있게 말하건대, 여태껏 도대체 씨보다 고집스러운 유머 감각을 가진 사람을 보지 못했다. 그 어떤 슬픔과 분노의 사건 사고들도 그녀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무해한 애들이 되곤 했다. 당신의 해독작용도 이 책이 도울 것이다. (요조-뮤지션)

 

요조씨의 추천사인데요. 요조씨가 보증하고 제가 사인합니다. 제 딸이 공증하고요. 제가 눈물까지 흘리며 웃으니 딸아이도 옆에서와서 함께 보고 웃음 바이러스에 그만 전염되고 말았네요.

 

딸과 저를 한 방에 쓰러뜨린 핵폭탄급 웃음 이야기는 바로 ‘하이힐의 진실’편입니다.

전 운동화파라서 하이힐을 신었던 적이 다섯 손가락 꼽을 정도인데요. 여자라서 그런가요, 하이힐 에피소드는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죠. 한쪽이 부러지면 다른 쪽도 같이 부러뜨려 높이를 맞추겠다 싶은데... 이 에피소드의 결말, 저에겐 핵폭탄급 유머였습니다. 뒷이야기 너무 궁금하지 않으세요. 글 말미에 공개할게요.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는 재밌는 만화만 있는 건 아닙니다. 깊이 있게 전달되는 메시지도 많아요. 굳이 긴 글이 아니더라도 생각을 이끌어내고 의미도 줄 수 있는거구나 작가 능력에 감탄했어요. 그 중 두 편만 소개하자면요.

 

‘강하다는 것’

예전에 나는 세게 보이려고 회사에서 누가 성희롱 수준 음담패설을 해도 괜찮은 척 넘어갔고 내가 먹지 않는 개고기 회식에도 따라가고 그랬다. 지금 생각하면 그럴 필요가 없었다.

강하다는 것은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게 아니라 거부할 줄 아는 것이었다. (45쪽)

 

요즘은 직장의 회식 문화가 많이 바뀌었을 것 같은데요. 20년 전쯤 제가 직장인일 때는 회식은 거의 술자리였습니다. 회식도 업무의 연속이라 술 잘 마시는 사람이 유능한 사람으로 평가되곤 했어요. 저도 그런 부류에 끼고 싶어서, 약하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잘 못 먹는 술임에도 불구하고 센 척했어요. 그때 제가 정말 강한 사람이었다면 거부했을텐데, 아무렇지 않은 척하다 몸이 생고생했지요. 지금은 얼추 강한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해요. 술은 서른 살부터 입에 대지 않았고요. 술 아니어도 저에게 버겁다 싶은 일은 거부하고 거절도 곧잘하는 편이라고 자평합니다. 몸도 생고생 안 하지만 정신 건강에도 아주 이로워요.

 

한 가지 더 나누고픈 작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평소 기분 나쁠 때는 타인을 탓하기 쉬우면서도 좋은 기분은 온전히 나로 인해 유지된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제야 깨달았다. 평소 나의 평온한 마음은 나 혼자서 유지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매일 마트나 식당을 가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택배기사나 이웃들과 마주치면서도 그럭저럭 평온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는 건 그들이 예의 바른 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일일이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지만, 나의 평온한 일상은 누군가의 예의 바름 때문이다. 그 사실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235쪽)

 

기분이 좋고 나쁨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각들이 외부로 투영되어서 그렇다고는 알지만 평온한 마음이 유지되는 데 예의 바른 타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생각, 참 신선합니다. 나를 항상 웃으면서 대해주시는 과일가게 사장님, 친근하게 말 걸어 주시는 세탁소 사장님, 제가 건네는 요구르트 한 병, 귤 하나에도 연신 감사하다 하시는 실버택배 어르신까지. 제 주위에도 저의 평온한 일상을 유지시켜주시는 예의 바른 분들이 참 많았습니다. 저도 잊지 않을려고요. 오늘도 즐겁게 제 하루가 마무리되는 건 그분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이힐의 진실 뒷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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