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구운몽

꿈트리숲 2020. 4. 13. 06:00

학창 시절 시험에 나온다고 열심히 외운 작품 중에 서포 김만중의 <구운몽>이 있습니다. 꿈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과 어머니를 위해 소설을 지었다 정도만 부수적으로 알고 있었어요. 결코 <구운몽>의 내용이 궁금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올해 문사철 50권 읽기로 마음먹고 이책 저책 찾아보고 있는데요. 상대적으로 외국의 고전 문학은 많이 접하기도 하고 제목도 아는 게 많은 반면 한국 고전 소설은 제목만 알거나 아니면 아예 처음 보는 책들이 많아서 조금씩 읽어 보려 합니다.

 

<구운몽>은 조선 숙종 때 지어진 소설입니다. 한문본과 한글본 둘 다 전하는데요. 제가 읽은 <구운몽>은 서울대 국문과 교수이신 정병설 선생님이 옮기신 <구운몽>을사본의 완역본입니다. 이것이 가장 오래된 <구운몽> 필사본이라고 하는군요.

 

당나라 때 남악 형산 연화봉에 서쪽 천축국에서 온 육관대사가 암자를 짓고 제자를 길러내고 있었습니다.

그중 성진이라는 젊은 불승이 있었는데, 용모도 빼어나고 지식 또한 뛰어나서 스승이 후계자로 삼고 싶어하는 제자였습니다.

어느 날 성진은 육관대사의 심부름으로 동정호의 용왕에게 인사를 하러 갑니다.

 

용왕을 만난 성진은 계율을 어기고 용왕이 권하는 술을 마시고요. 돌아오는 길에는 술기운에 팔선녀와 돌다리에서 몇 마디 주고받습니다. 절로 돌아와서도 선녀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지요. 이에 육관대사가 성진을 크게 꾸짖고 팔선녀까지 불러 지옥으로 보내게 됩니다.

 

마음이 정결하지 않으면 비록 산속 깊은 절에 있다 해도 도를 이룰 수 없는 법이다. 하지만 근본을 잊지 않으면 속세에 푹 빠져도 마침내 돌아올 곳이 있다. (27쪽)

 

이 말은 성진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것 같아서 귀에 쏙 박히는 말이네요.

 

지옥으로 간 성진과 팔선녀는 염라대왕의 명령으로 인간 세상에 환생하게 됩니다. 이전의 기억은 모두 잊은 채 말이죠.

양소유로 환생한 성진은 여전히 똑똑하고 슬기롭고 빼어난 용모를 지녔습니다. 나이 열여섯에 과거 급제를 해서 관직에 나가고 왕의 부름으로 나가는 곳마다 공을 세워 승상의 자리에 오르고 많은 재물을 쌓게 되죠.

 

그와 동시에 양소유가 가는 길목 길목에는 세상에 이보다 아름다울 수 없는 여자들이 차례차례 나타나 양소유와 연을 맺고자 합니다. 진채봉을 시작으로 계섬월, 정경패, 가춘운, 적경홍, 난양공주, 심요연, 백능파 등 여덟 명은 각각 소유의 부인과 첩이 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여덟 부인이 성진과 함께 인간 세상으로 환생한 팔선녀예요.

 

양소유는 난양공주와 정경패를 부인으로 맞고요, 나머지 여섯 명은 첩으로 받아들이지요. 난양공주와 정경패, 두 명의 부인을 맞이할 때 흥미진진한 스토리가 있는데요. 결혼 당사자인 소유는 제쳐두고서 궁궐과 정경패 집안 간의 오고 가는 얘기가 참 재밌어요. 우여곡절 끝에 정경패는 영양공주라는 새로운 지위를 얻어 소유와 혼인할 수 있게 됩니다.

 

여덟 명의 부인에게서 골고루 아들딸 낳고 부귀영화 다 누리며 나이가 든 소유는 어느 날 인생무상함을 깨닫고 불도에 귀의하고자 합니다. 이때 육관대사가 소유 앞에 나타납니다.

 

여덟 부인은 어디로 사라졌고 대궐 같은 집도 모두 사라졌어요.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 못 하는 소유에게 사부는 크게 한 말씀 하십니다.

“성진아, 인간 세상의 재미가 어떻더냐?”

 

네, 소유와 여덟 부인의 이야기는 성진의 꿈이었던 겁니다. 수행 중이던 성진에게 육관대사가 꿈으로 깨달음을 전해주었던 것이죠. 벼슬을 차지하려고, 혹은 아름다운 여인을 얻으려고 욕심냈던 것들이 한낱 꿈이었음을 알게 된 성진은 육관대사를 이어 좋은 스승이 되었고요. 팔선녀는 비구니가 되어 성진을 스승으로 모시고 후에 모두 극락왕생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이 납니다.

 

세속의 탐욕은 일장춘몽이어서 부질없는 것이다, 혹은 성취란 덧없음인가 등 주제를 고민하는 제게 작품의 해설 부분은 그런 강박 다 내려놓으라고 조언해줍니다.

 

<구운몽>은 작가가 그런 고단한 상황에서 정신적 안식을 위해 쓴 작품이니만큼 소설에서 무엇을 배울까 어떤 교훈이 있을까 찾을 일이 아니다. 먼저 작품 자체에 빠져 들어보는 것이 좋은 독법이 될 것이다. 무엇을 찾고 무엇을 배우는 데만 인생의 의미가 있지 않다. 쉬고 즐기는 것도 찾고 배우는 것 이상으로 소중하다. (415쪽)

 

고전을 읽으면 으레 뭔가를 찾아야만 한다는 강박이 있어서 편하게, 쉽게 읽을 수가 없었던 게 사실이에요. 오늘 그 의무감, 그 강박감에서 마음 편히 빠져나올 수 있겠습니다. 인생의 의미는 쉬고 즐기는 데에도 있음을 <구운몽>을 통해 깨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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