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며느라기

꿈트리숲 2019. 1. 3. 07:24

예쁨받지 않아도 우리는 소중한 존재

 

지난 추석때였던 것 같아요. 으레 명절 시즌이 다가오면 신문이나 방송에서 명절 노동에 대해서 많이 언급하더라구요. 저도 며느리 입장이기에 그런 기사들은 꼼꼼히 잘 챙겨봅니다. 본 후에는 남편에게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하고 물어봐요. 제사를 지내는 것에 대해서 혹은 가족들이 모이면 여자들만 일하는 것에 대해서요. 남편은 적극 돕겠다고 하지만 돕는다는 개념이 좀 불편하네요. 여자들이 주가 되서 일하고 남자는 거드는 느낌, 별로입니다.

기사들 중 유독 눈에 띄는 건 책과 영화소개였는데요. 며느리들의 자기 목소리내기라며 <며느라기> 책과 'B급 며느리'라는 영화였어요. 시대가 많이 바뀌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는 며느리라는 그 이름에 대한 불만이 이제는 꺼내놓고 얘기할 수 있는 시대가 온 것 같아서요. 그래서 저도 그 기사를 보고 남편에게 얘기했어요. 명절에 항상 시댁 먼저 가서 전부치고 차례 지내고 친정가니까 이번에는 우리집 먼저 가겠다고요. 남편은 그러자고 하더라구요. 친정 엄마에게 얘기했더니 엄마가 펄쩍 뛰어요. 시댁에 당연히 먼저가야 한다는거죠. 제 딸에게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실행에 옮기지 못했네요.

12월 어느 날 신문에서 한해 정리하는 책 소개 코너에서 요 <며느라기>책이 다시 소개되었어요. 딸이 보고서 책 주문하자고 하더라구요. 일단 '만화'라는 것에 마음을 뺏겼나봐요. 저도 보고 싶었던 책이라 냉큼 사 봤습니다. 아직 십대인 딸도 공감하고 저도 공감하고 남편만 외딴 섬이 되어버렸어요. 남편도 읽어 보면 며느리의 마음을 이해할려나 모르겠네요. 어쩌면 책 속의 남편에 감정 이입할지도 모를 일이에요.

책에서는 사춘기, 갱년기처럼 며느리가 되면 겪게 되는 '며느라기'라는 시기가 있다고 합니다. 며느라기는 시댁 식구한테 예쁨 받고 싶고 칭찬 받고 싶은 그런 시기라고 합니다. 보통 1, 2년이면 끝나는데 사람에 따라 10년 넘게 걸리기도 혹은 안 끝나기도 한다는군요.

저는 사실 결혼하면서 시부모님께 예쁨 받으려는 마음 보다는 친정 엄마가 시켜서 그렇게 해야하는 줄 알았던 게 더 컸던 것 같아요. 아침 마다 전화 드리기, 시댁 가서는 앉아있지 말고 청소라도 하기, 명절에는 시부모님이 친정 가라고 할 때까지 있기 등등. 왜 그래야 하는데? 라는 물음이 절로 나오는 행동들입니다. 아침 마다 전화 드리기는 결혼 하고 일주일 정도 하다가 시어머니께서 안해도 된다고 해서 그만뒀구요. 시댁 가서는 잘 앉아있습니다. 설거지는 잘하는 편이구요. 청소는 가끔, 아주 가끔씩 해요. 명절에는 제가 가고 싶을 때 움직입니다. 며느라기 책 이전에 전 이미 나를 찾고 싶었어요. 시댁에서는 마치 나라는 사람은 그저 누구집 몇째 며느리로 동서로 형님으로 이름도 없이 불리는 게 싫더라구요.

그리고 저는 밥 할려고 결혼한 것이 아닌데, 시댁만 가면 이상하게 밥하고 설거지 하는 것은 전부다 여자 몫입니다. 가끔씩 남편이나 아주버님께, 그리고 남자 조카들에게 설거지나 그릇 정리 시키면 어머니는 그렇게 환영하는 분위기가 아니더라구요. 막상 제 딸이 하면 잘 한다고 하시는게 왠지 저는 '너는 여자니까 그리하는게 당연한거야' 라고 느껴집니다. 저의 친정도 마찬가지에요. 엄마가 남자들을 시키지 않습니다. 시키지 않는게 뭐에요, 오히려 할려고 하면 말립니다. 이럴 땐 보수적이라는 말을 안쓸 수가 없네요. 엄마와 어머니들이 살아온 시대가 그러니까 이해할려고 하지만 세상이 변하고 있으니 우리 부모님들도 같은 여자 입장에서 딸을, 며느리를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어요.

며느라기는 며느리를 아이와 같은 존재라 여겨 며늘아기라 부른 것에서 파생 된 말인 듯 합니다. 옛날 조혼 풍습이 있을 때는 일찍 결혼을 하다보니 실제로 신부가 많이 어렸죠. 그러니 가르쳐야 하는 아기 같았을 거에요. 하지만 요즘은 결혼 평균 연령이 남녀 다 30이 넘어요. 그리고 어른으로 각자 자기 한몫은 다 해내기에 따로 뭔가를 가르쳐야 하는 아이는 아닙니다. 시댁의 가풍을 물려주고 싶다면 며느리 보다는 아들과 딸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은데요. 제사도 며느리는 한번도 본적없는 할아버지 할머니인데 아들은 제쳐두고 며느리만 와서 노동력을 제공하라고 하면 며느리 마음에 정성이 깃들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할아버지 할머니와 추억이 있는 아들 딸이 더 정성으로 제사상을 차릴 가능성이 높죠.

우리 여자들도 누군가가 우리의 권리와 자리를 찾아 안내하기 전에 우리 스스로 당당하게 말하면 좋겠다 싶어요. 우리는 시부모님께 예쁨 받으려고 존재하는 며느리가 아닙니다. 예쁨 받지 않아도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나를 지키지 못하는 순간들이 쌓이면 며느라기는 계속 될지도 몰라요. 식은 밥 먹고, 설거지 하느라 남은 거 먹어치우는 그런 며느라기가 아니라 같이 일하고 같이 얘기 나누며 온기 있는 음식을 먹는 당당한 며느리가 되도록 같이 노력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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