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내 어머니 이야기

꿈트리숲 2019. 2. 26. 06:33

글은 결코 어피덩 완성되지 않았다

저의 핸드폰에 네이버 첫 화면은 항상 '책문화' 섹션이 나오게 해놨어요. 그래서 검색하러 핸드폰 열었다가 신간 책 소개도 보고요, 저자 특강 소식도 알게되곤 합니다. 어느날 만화책 소개를 봤는데, 알쓸신잡에서 김영하 작가가 추천한 책이라고 하더라구요. 내용은 모르겠는데 책 제목이 <내 어머니 이야기>여서 한번 읽어보고 싶다 생각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 찾아봐도 책은 없고, 한참 지난 후에 우연히 도서관에서 발견했는데 제 차례까지 오기를 많이 기다렸죠.

드디어 읽은 <내 어머니 이야기>는 만화라서 만화라는 두 글자의 가벼움으로 지나가기에는 많이 아까운 책이다 싶어요. 물론 만화라고 다 가벼운 것은 아닌데, 흔히 생각하기에 만화는 그냥 술술 읽고 넘어가는 책쯤으로 여기잖아요. 그런데 이 책은 만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저에게도 큰 재미와 의미를 주는 것이어서 기억에 오래도록 남을 것 같아요. 저 평생 읽은 만화책이 몇 권 없기도 합니다.(도올 만화 논어, 며느라기, 유부녀의 탄생 등이 본 만화의 전부 같기도^^;)

<내 어머니 이야기>는 김은성 작가의 어머니이신 이복동녀여사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고스란히 담은 개인 히스토리입니다. 그런데 그 개인 역사가 바로 곧 우리 과거사, 현대사를 품고 있어서 우리의 역사라고도 할 수 있어요. 그 시대를 살았던 살지 않았던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고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에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평범한 이야기는 우리의 역사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아 이야기로서의 가치 뿐만아니라 역사 교과서에서는 알려줄 수 없는 생동감을 선사합니다.

나 같은 사람을 그린 것도 만화가 되냐?”

작가가 자신의 엄마를 만화로 그린다고 했을 때 이복동녀 여사가 하신 말씀이에요. 보통 작품이라고 하면 멀리에서 소재를 구하려고 합니다. 내 얘기, 내 가족의 얘기는 너무 평범해서 얘기가 되겠어? 라는 편견을 종종 가지죠. 하지만 작가의 어머니가 풀어내는 기억은 예사롭지 않은데다가 기록으로서의 가치도 크겠다는 생각에 만화이야기 작업을 시작하신 것 같아요.

엄마가 살아온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나는 그 놀라움에 집중했다. 그건 내가 아는 역사와는 다른 차원의 무엇이었다.
흥남 부두가 남선으로 나갈려는 사람들로 백사지야. 배에 탈 수 있게 그 사이에 다리를 놨더라구. 미군이 손을 잡아서 들어올려 주더라구. 그러구 배에 들어갔는데 배가 학교 운동장만하더라구. 그러니까 두고 온 엄마 아버지가 어떻기 생각나는지 그 자리에 기절해서 거제도에 내려놓을 때까지 일어나지 못했어. 정든 가족과 생이별을 그렇기 하게 된 거야. 그렇기 고향땅을 떠났지.” -2-

영화 국제시장을 보면서 흥남부두에서의 피란민들의 긴박했던 상황을 처음 알게 됐는데요. 이복동녀 할머니 얘기를 들으니 다시 한 번 그때 가슴 미어지는 상황이 떠오르더라구요. 배를 못 타게 되면 어쩌나 마음 졸이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들과 어느 날 갑자기 헤어지는 모습이 사실적으로 전해져서 더 마음이 절절했어요.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 어머니는 딸에게 그날의 상황을 담담히 풀어내시지만 그때는 얼마나 쓰리고 미어지고 했을까요? 그렇기에 흥남부두에서 기절해서 거제도까지 일어나지 못했겠죠. 저도 그렇고 전쟁을 겪지 않은 세대는 그 애끊는 심정을 어떻게 상상이나 하겠어요.

어머니는 일제강점기때 태어나서 해방도 겪고 6.25도 겪고, 70~80년대 경제성장기도 다 거치면서 현대사의 산 증인이나 다름없어요. 저자가 구체적으로 그 시기들을 기록할 수 있었던 건 이복동녀 여사의 기억력이 아주 좋은 덕분입니다. 그리고 말솜씨도 좋아서 어머니 얘기에 당시 동네분들 뿐만아니라 저도 홀딱 빠졌었네요. 처음엔 이야기 대부분이 함흥 사투리여서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던데, 각주 보며 읽다보니 나중엔 함경도 사투리가 그렇게 친숙할 수가 없는 겁니다. 어피덩 다음 얘기가 궁금해져요. ‘어피덩어서’, '빨리'라는 함경도 사투리에요.

만화를 이끌어가는 어머니의 이야기 솜씨는 그 시대 어딜 가나 환영받는 요인인데요. 거기에 또 하나가 더해져요. 바로 음식솜씨. 어릴 때 함경도 북청에서 나고 자라면서 대식구를 건사하는 친정 엄마의 음식솜씨를 보고 배워 그런지 명태 식해, 순대 할 것 없이 넉넉하게 맛있게 잘 만들어요. 흑백 만화 보면서 침이 고이는 신비한 체험도 했네요. 이복동녀 어머니가 인기가 많은 이유는 말솜씨, 음식 솜씨, 그리고 사람을 따뜻하게 대해주는 마음씨도 한몫 합니다. 그 씨앗 3개는 세대불문하고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사람을 끄는 주요인 입니다.

시대를 생각하면 암울하지만 그 속에서도 웃음꽃이 피고 서로를 사랑하고 믿고 의지하는 모습은 참 재밌고 좋은 가족의 모습이다 생각이 들었어요.

엄마는 일제강점기에 함경도 촌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일본 위안부에 끌려가지 않으려고 억지 결혼을 하고, 전쟁으로 부모와 생이별을 한 고통스러운 역사 속에 살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을 일가친척 중에 두지 않았고, 일본인이 세운 학교를 즐겁게 다녔으며, 결혼한 지 닷새 만에 해방이 되어 남편이 군대에 끌려 나가지 않게 됐다는 이유로, 해방된 게 너무도 싫었다는 엄마의 얘기도 역사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객관적인 역사와 엄마가 체험한 역사는 달랐지만, 주관적 체험이 지닌 신선함이 있었다. -작가의 말에서-

역사 교과서에 실린 객관적인 역사가 아니라 한 개인이 체험한 주관적 역사는 박제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이야기에서 이야기로 전해진다면 언젠가 사라질 지도 모르지만 이렇게 기록으로 남게되어 정말 다행이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주관적 체험, 그것들을 다 기록으로 남겼더라면 더 풍성하고 생생한 역사가 되었을텐데. . . 하는 아쉬움이 남네요.

역사는 시대라는 객관적 토대위에 개인의 주관적 일상이 차곡차곡 올라가는 기억 같기도 하지만 시대와 개인의 시간이 씨줄과 날줄로 교차되면서 촘촘히 짜여지는 작업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씨줄만 있어도, 날줄만 있어도 옷감은 만들어지지 않아요. 객관적 역사와 체험적 주관적 역사가 얼기설기 엮이면 그것이 살아있는 역사이고 절대 꺼지지 않는, 사라지지 않는 역사가 될 것 같아요.
역사를 써 오셨던 모든 어머니,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오늘의 제 시간도 지극히 주관적 체험이지만 먼 미래에서 봤을 땐 소중한 21세기 역사입니다. 오늘 하루 우리는 모두 역사를 쓰고 있어요.

절판되었다 복간된 <내 어머니 이야기>, 10년이 걸려 완성된 <내 어머니 이야기> 어피덩 보깁지요?

728x90

'배움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본격 한중일 세계사  (8) 2019.03.05
제4의 식탁  (4) 2019.02.27
이슬아의 매일 뭐라도  (6) 2019.02.25
나를 지키며 일하는 법  (4) 2019.02.21
클래식 수업  (6) 2019.0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