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일상

살림을 살다

꿈트리숲 2020. 3. 20. 06:00

살림은 ‘살리다’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도 살리고, 산 사람은 더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살림일 텐데요. 저는 사실 살림을 우습게 알았던 때가 있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집안 살림은 바깥일을 할 능력이 안 되어 어쩔 수 없이 하는 거라 여겼던 거죠.

 

해도 티가 안 나고, 안 하면 안 한 티가 확 나는 그래서 매일 쓸고 닦고 해야만 일상이 유지되는 비합리적이고 피곤한 일이 살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되도록 집안일을 멀리하려고 했어요.

 

결혼 전까지 학생 때는 공부한다는 이유로, 직장인일 때는 회사 다닌다는 핑계로 요리조리 살림을 피해 다녔습니다. 결혼 후에도 출산 전까지는 워킹주부였기에 살림을 했다고 말할 수준이 못 되고요.

 

아이 낳고 육아와 살림이 저의 양어깨에 툭 하고 떨어지고서야 살림에 눈을 뜨기 시작했어요. 그때는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대략난감이라 요리도 책, 살림도 책, 육아도 책에만 의존했습니다. 엄마에게 물으면 쉬울 것을 저는 지지고 볶는 한이 있더라도 혼자서 해결해보려 했죠.

 

엄마의 방법보단 책에서 전하는 살림 전문가들의 참신한 방법들에 더 혹했기 때문인데요. 어쩌면 그들의 삐까뻔쩍한 살림이 더 탐났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마음일 거예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이 전혀 틀리지 않았음을 새록새록 느끼는 요즘입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나무 도마를 마련했어요. 이전까지 실리콘 도마를 사용했는데요. 엄마의 나무 도마는 왠지 구식 같아서 훨씬 세련되 보이는 파스텔톤의 실리콘 도마를 신혼 때부터 써왔어요. 그러던 제가 작년 말부터 제로웨이스트 삶에 관심을 두면서 사람의 건강에도 지구 환경에도 이로운 것들에 눈길을 주고 있습니다.

 

실리콘 도마 교체 시기가 되어 자연스레 나무 도마를 집에 들였어요. 실리콘 도마는 버려지면 몇십 년이 흘러도 썩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이제부터는 쭉 나무 도마만 쓸 것을 다짐합니다. 나무 도마가 수명이 다해 버릴 때가 온다면 그때는 지구에 덜 미안할 것 같아요. 엄마는 미리 알고서 나무 도마만 쭉 써오셨나 모르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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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그렇지만 예전 엄마의 살림은 저를 살리는 살림이었던 걸 아프고나서 많이 깨달았어요. 불편하고 오래 걸리더라도 메주를 띄우고 장 담고 마늘 까고 다지고, 깨도 볶고 온갖 나물을 직접 말리며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가족들 건강 하나는 내가 책임진다는 마음이었을까요? 아니면 자식들 입에 들어갈 음식은 내 손으로 직접 만든다는 자부심이었을까요? 아침마다 엄마의 나무 도마에서 카랑카랑 청량한 칼질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맛있는 아침 밥상이 준비되어있었더랬어요.

 

지금은 알아요. 엄마가 매일같이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잠든 식구들 깨우지 않으려 조심조심 아침을 준비했다는 것을요. 그리고 식구들 다 나간 시간에는 쓸고 닦고 정리하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티 안나게 유지하느라 엄마는 얼마나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까요?

 

아기자기우리자기아~~할새도없이내입으로먼저간다.jpg

엄마 살림이 건강한 살림이었고, 엄마 삶이 저를 살리는 방식이었어요. 그런 엄마에게 요리 레시피 이것저것 물어보며 요즘은 얼추 비슷하게 맛을 내고 있습니다. 만드는 요리마다 가족들 평점이 좋아서 역시 손장금(저의 엄마 애칭)의 후예답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어요. 전 요리를 못하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사실 맨손으로 음식 만지는 느낌이 좀 이상하긴 해요(아직 생선이나 육류는 못 만짐ㅠㅠ). 그래서 자칭 타칭 ‘요알못’이라고 하죠.

 

최근에 알았어요. 전 ‘요알못’이 아니라 ‘요싫못’이라는 것을요. 요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요리하기가 싫어서 못했던 사람이더라고요. 이제는 음식 만드는 걸 싫어하지 않아요. 제가 만든 음식을 맛있게 먹어주는 남편과 딸을 보니 만들 때 힘든 건 쉬이 잊어집니다.

 

손에쥐가나도록쥐어짰다당근주스.jpg

큰 아픔은 작은 기쁨들로 덮으라는 책의 말이 생각나네요. 매일의 살림이 저를 작은 기쁨으로 이끕니다. 어떤 큰 슬픔이나 아픔이 있었더라도 지금은 일상의 작은 기쁨들로 만회가 되어가요. 이제부터라도 살림을 잘살아보고 싶어요. 나를 위해 가족을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가 지구를 위해 현명하게 살림을 해보려고요. 엄마처럼 쓸고 닦고 씻고 말리고 하면서 티 안 나는 살림을 사는 멋진 살림꾼이 되어보려 합니다.

 

살림꾼의필살기-맛보장비주얼보장삼겹살묵은지말이찜(feat.수미네반찬).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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