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

꿈트리숲 2020. 3. 26. 06:00

수화(樹話) 김환기의 이름은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셨을 텐데요. 화가 김환기의 작품 <우주>가 한국 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를 기록해서 세간의 화제가 됐었죠. 저도 그 뉴스를 접하고 김환기 화가의 여러 작품을 인터넷으로 한 번 찾아봤었습니다.

 

우주( Universe  5 -IV- 71  #200 )

전 <우주> 작품을 보고서 어떤 의미인지 와닿는 바가 없었는데요.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보고 <우주>를 이해하게 됐습니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수화의 마음 안에는 몹시 절실한 것이 생겼다. 그리움이었다.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며 수화는 점을 찍어나갔다. 색과 자료에 대한 연구도 깊어졌는데 가슴 안의 것들을 더욱 잘 형상화하기 위한 실험들이었다. (170쪽)

 

선생이 찍어 나간 한 점, 한 점은 고국에 두고 온 그리운 사람들이었고, 보고 싶은 산천이었으며 듣고 싶고 맛보고 싶은 고향의 소리, 맛이었던 겁니다. 수많은 점을 찍으며 그리움도 함께 꾹꾹 찍어갔을 화가를 생각하니 제 마음까지도 그리움의 멍이 드는 것 같네요.

 

김환기 선생의 역사에는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김환기 선생의 아호를 가진 김향안 선생입니다. 아마도 <우리들의 파리가 생각나요>를 만나지 못했다면 김향안 선생을 평생 모르고 지났을 수도 있겠다 싶어요.

 

김환기와 김향안 두 분은 이혼과 사별의 상처를 겪고 만난 사이입니다. 김향안 선생의 결혼 전 본명은 변동림이었어요. 그리고 사별했던 남편은 우리가 잘 아는 시인 ‘이상’입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다닐 정도로 당시 신여성이었던 김향안은 이상과의 결혼도 김환기와의 재혼도 모두 본인의 의사대로 결정했는데요. 집에서는 반대가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더구나 김환기와의 재혼은 전처 자식이 세 명이나 있어서 부모로부터 재혼 허락을 받을 수 없었다고 해요.

 

김향안은 변씨 성을 버리고 남편의 성인 김씨를 쓰기로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이름도 갖게 되었죠. 김환기의 아호였던 ‘향안’이 그것입니다. 자신의 아호를 아내에게 주고 김환기는 새로운 아호로 ‘수화(樹話)’를 지었다고 하네요.

 

‘곱게 살자’가 두 사람의 결합의 모토였다고 하는데, 결이 고운 두 사람의 만남과 잘 어울리는 모토같습니다. 일본에서 그림 유학을 하고 한국에 돌아와 서울대 홍익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김환기 선생은 세계 수준의 그림을 무척이나 만나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아내의 미술평론 공부열과 맞물려 두 사람은 파리로 떠날 결심을 합니다.

 

먼저 실행에 옮긴 이는 김향안 선생이었습니다. 미리 가서 프랑스어 공부도 하고, 아뜰리에도 구해놓고, 전시회도 날짜를 다 잡아뒀죠. 여러 전시를 보면서 그림을 보는 안목을 키워 남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했습니다.

 

자꾸 꿈을 꾸는 남자가 그 꿈을 현실이 되게 하는 아내를 만났다.

남자는 자꾸 큰 세상을 그렸고 아내는 그 큰 세상에 남편을 서게 했다. (40쪽)

 

김향안 선생은 흔히 말하는 내조하면서 철저히 남편의 그림자로 사는 그런 아내가 아니었어요. 자신의 공부도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남편과 함께 성장하는 아내였습니다. 계속 글을 써서 남편의 가치를 세상에 알리고, 전시회를 열어 김환기 선생의 그림을 세상과 만나게 해주었어요. 그는 '내조'라는 말 대신 '협조'가 그들 부부 사이를 더 잘 설명하는 단어라고 했습니다.

 

협조하는 아내를 둔 남편의 심경은 어떨까요?

 

출렁이는 두려움을

한순간 잠들게 해주는 사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세상 더 많은 사람들이 알게 해주고

 

나로 하여금 기꺼이 용기내서

더 아름다운 세상을 향해가게 해주는 사람.

 

때로는 입과 귀가 되어주고

때로는 세상을 만나는 통로가 되고

문이 되어주는 사람.

 

수화에게 향안은 그런 아내였다. (86쪽)

 

수화와 향안의 사랑은 어느 한쪽이 더 많이 하는 사랑하는지 따져 묻는 저울질이 아니라 서로 더 잘 사랑해서 서로의 성장에 보탬이 되어주는 믿음과 배려였던 것 같아요. 그래서 김향안 선생은 사랑은 곧 지성이라고 말씀하셨던가 봅니다. 서로를 응원하는 지성, 서로를 위해 배우는 지성, 내일을 믿고 긍정하는 지성 이 모든 지성이 곧 사랑이라고 합니다. 저도 남편에게 그런 아내가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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