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엄마와 딸

인생 별거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

꿈트리숲 2020. 4. 21. 06:00

딸과 나는 죽이 잘 맞는 편이다.

특히나 방학 때면 잠자는 시간 빼고는 거의 함께 있다 보니 눈빛만 봐도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있는 그런 사이다.

 

그런 딸과 아옹다옹 옥신각신할 때가 있으니 바로 먹는 걸 앞에 둘 때다.

내가 낳은 딸이지만 나와 먹는 스타일이 판이하다.

난 한 번에 먹고 끝내는 타입이고 딸은 한 개씩, 한 개씩 먹는 스타일.

그렇기에 먹는 속도에서 현저히 차이가 벌어져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많이 생긴다.

 

“엄마! 다른 친구들은 집에 라면이나 과자를 종류별로 쟁여 놓고 먹는대.”

“그래?”

“우리 집은 그렇지 않아서 엄마와 과자 한 봉지 가지고 싸우며 먹는다고 했더니, 애들은 이해 안 된다는 표정이던데?”

“집마다 문화가 다른 거니까.”

“그런데 다들 엄마하고 재밌게 논다고 한마디씩은 하더라.”

“거봐~~~ 엄마처럼 재밌게 해주는 사람 없다니까!!! 과자 가지고 싸우는 건 다 널 재밌게 해주기 위한 나의 빅픽처야, 인제 알겠어?”

 

빅픽처 1. -양파링 한 봉지로 모녀 사이 금 간 사연

 

 

 

내가 먼저 딸에게 과자를 한 봉 사주는 날은 필시 딸에게 뭔가 부탁할 일이 있거나 미안한 일을 했을 때다. 그날도 장보러 가면서 딸에게 물었다. “나가는 길에 맛있는 거 사 올게, 말만 해” 딸은 양파링이 먹고 싶다고 했다. 난 질소 사면 과자 덤으로 주는 거, 그거 말하는 거지? 하면서 나간다.

 

딸은 엄마 것도 사 오라며 신신당부다. 평소 자기 것 빼앗아 먹는다고 불만을 가지고 있던 터라 불미스러운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그러면 나는 “난 건강 챙겨야 하는 사람이라 과자 같은 거 안 먹어” 하면서 쿨하게 나간다.

 

나갔다 들어오는 내 손엔 양파링 한 봉지가 들려있다. 딸은 중드를 보며 먹겠다며 컴방으로 간다. 난 쫄래쫄래 딸의 뒤꽁무니를 따라 들어간다. 양파링 먹고 있는 딸을 보고 있으면 몇 개 줄 것 같아서다.

 

진짜 딱 한 개를 건네준다. 한 개는 절대 절대 내 성에 차지 않는 양이다. 암 그렇고 말고. 계속 딸을 쳐다본다. 결국엔 봉지 입구를 활짝 열어서 공유해준다. 작지만 알차게 집어 오는 내 손엔 양파링 네다섯 개가 딸려온다. 딸이 한마디 한다.

“한 개씩 먹어”

그럼 난 또 응수한다.

“한 개씩 먹으면 봉지 잡고 있는 너에게 방해될까 봐 일부러 한 번에 집어 오는 거야.”

“엄마는 날 위하는 척하면서 한 번에 집어 가서 그걸 한입에 다 넣잖아?!”

정곡을 찔렸다.

 

눈치 보며 중드에 집중한 딸의 시선을 피해 조심스레 한 주먹 또 집어온다. 소리 안 나게 오물오물 씹어 먹는다. ‘나 원래 양파링 안 좋아하는데... 이렇게 먹으니 맛있단 말이지’ 하면서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쯤

“엄마!!!!!!!!!!!!!!!!!”

딸이 폭발했다. 그동안 많이 참았나 보다.

딸이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엄마가~~~@##$$%%!!##$#%&^&$^#@$#@$#%^&*&$%^#!$!@”

안 들어도 대충 무슨 내용인지 짐작이 간다.

그날 저녁 남편은 과자를 종류별로 사 왔다. 당분간 과자로 아옹다옹할 일은 없을 것 같다.

 

그 과자를 다 소진하고 어느 날, 난 또 과자를 한 봉지만 샀다.

딸과 또 아옹다옹할까 봐서 전자저울을 꺼낸다. 딸이 보는 앞에서 정확하게 반반 나눴다.

그리고 서로 남의 것을 탐하지 않기로 했다 (나만 탐하지 않으면 된다).

 

난 정말 과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도 딸과 함께 먹으면 과자가 더 맛있다. 그리고 자꾸 먹고 싶어진다. 왜 그런걸까?

 

남편은 맛있는 것이 있으면 딸에게 먼저 주고 싶어 하고, 또 딸이 먹는 것만 봐도 배부르다며 쳐다보고 있다. 난 내 입으로 뭔가가 들어와야 배부르고 행복하다. 그리고 혼자 먹는 것보다, 누군가 먹는 걸 그냥 바라보는 것보다 같이 먹는 것이 더 좋다.

 

아마도 내가 딸과 과자를 가지고 아옹다옹하는 건 같이 먹는 즐거움을 극대화하기 위한 내 나름의 장치가 아닐까 싶다. 양파링을 두 봉 살 수도 있고, 과자를 종류별로 하나씩 살 수도 있는 문제인데, 굳이 딸이 먹고 싶어 하는 과자 하나만 사 와서 매번 옥신각신하기에 내가 생각해낸 내 나름의 변명 같지만 진심이다. 딸을 재밌게 해주겠다는 빅픽처.

 

빅픽처 2 –젓가락 하나로 배꼽 잡아 뺀 사연

 

 

 

4월 초에 온라인 개학을 하면서 더이상 딸이 준비하는 점심을 먹을 수 없게 되었다. 개학을 했으면 급식을 먹어야지 난 왜 점심을 준비해야 하는 거냐며 볼멘소리를 한다. 그래서 설거지는 딸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이럴 때면 팥쥐 엄마 같은 아이디어가 샘솟는다^^;;)

 

딸은 자신이 설거지를 책임지게 되자 어떻게든 설거지 꺼리를 줄이려 노력한다. 대표적으로 과일 먹을 때 포크를 쓰지 않는 것이 그 예. 수저 씻을 때 포크가 끼면 한꺼번에 씻기 힘들다며 남편과 나에게도 과일은 젓가락으로 먹으라고 한다.

 

며칠 전 달디 단 토망고(설탕친 맛이 나는 토마토)를 사이좋게 한 개씩 먹기로 했다. 난 토망고를 씻고 딸은 젓가락을 준비해놓고 피아노 치러 방으로 갔다. 토망고를 한 접시씩 담아서 식탁으로 오니 젓가락 한 쌍이 아니라 한 개씩을 각자의 자리에 준비해놓은 거다.

 

 

그림 - little space

 

그걸 보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음... 녀석, 설거지 어떻게든 줄여볼 심산이구만. 그렇다면 난 너의 의중을 파악하고 한 수 더 뛰어넘어 주겠어.’ 난 젓가락 한 쌍씩 되도록 맞춰놓고 딸을 불렀다.

 

 

그림 - little space

 

토망고의 달달함에 빠져 젓가락이 쌍이었는지, 낱개였는지 까먹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토망고 맛있다고 먹고 있을 때쯤.

“엄마!!!!!!!!!!!!!!!!!!”

“왜?!”

“엄마는 왜 젓가락 한 쌍으로 먹어?”

토망고를 집고 있는 딸의 젓가락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딸은 젓가락 한 개로 아슬아슬 토망고를 걸치고 있었다.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먹었는데, 딸도 나도 상대의 젓가락 개수는 보지 못했다.

“왜 엄마는 젓가ㅋㅎ 한 ㅆ$%$#^ 먹는건데%$#ㅋㅋㅋㅋㅋ 내가 설거#%큭ㅎ 줄이ㅉ%#크큭 ^ 일부러 한 ㅆ%크흑@&^%#^ ㅎㅎㅎㅎㅎ”

“난 그럴 줄 알ㅋㅎ크큭 너 설거지$#%# 더 하게 푸풉$$#$ ㅋㅋㅋㅋㅋㅎㅎㅎㅎㅎ”

 

서로 보고 싶은 것만 봤다. 딸은 자신이 한 개씩 놓은 젓가락을 의심하지 않았기에 버젓이 식탁에 놓여있는 한 쌍의 젓가락이 눈에 들어오지 않은 거고. 나는 딸의 의중을 간파하고 한 쌍씩 젓가락을 놓았기에 당연히 딸도 젓가락 한 쌍으로 먹는 줄 알았던 거다.

서로가 생각한 대로 상대도 그럴 것이라 믿은 우리 모녀, 젓가락 하나로 행복의 나라에 갔다 왔다.

 

우린 역시 죽이 잘 맞는다. 눈물을 흘리며 배꼽 잡느라 하고 싶은 말을 채 끝맺지 못하는 것까지 잘 맞누나.

 

“인생 별거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 어쩌면 어머니는 살수록 어려운 게 인생이지만 그럴수록 삶의 재미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셨던 게 아닐까.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 中-

 

고민할 일 많고 얼굴 찌푸릴 일 많은 인생, 양파링 한 봉지로도, 젓가락 한 쌍으로도 웃을 일은 세상에 차고 넘친다. 별거 없는 인생 재밌게, 더 재밌게 살고 싶다. 딸도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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