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스피닝

꿈트리숲 2020. 5. 8. 06:00

채널 예스를 통해 가끔씩 좋은 책을 알게 되는데요. 이번엔 만화책을 소개받았습니다. 먼저 알아본 것은 딸이에요. 아이가 열 살 때쯤 잠시 피겨스케이팅을 배운 적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아이 눈에 들어왔던 것 같아요.

 

<스피닝>, 피겨 꿈나무들의 이야기겠거니 했는데, 웬걸요. 아이가 읽고 나서 한다는 얘기가 “저자가 동성애자야.”라고 하는 겁니다. 엉? 너무 꿈같은 상상을 한 제게 당혹감을 좀 주네요.

 

일단은 아이가 재밌다고 했으니 한번 읽어봐야겠다 했고, 또 동성애를 어떻게 표현했나 궁금하기도 하더라고요. 저는 거의 마흔이 넘어서 만화책에 입문했는데요. 그렇게 만난 작가가 김보통, 수신지, 김은성 만화가 등입니다.

 

그들의 만화는 일상의 얘기를 담은 거여서 마음 잔잔하게 때로는 웃음도 웃어가며 볼 수 있는 책이었었죠. <스피닝>을 보면서는 일상이 항상 잔잔하고 웃음 지을 일만 있는 건 아니었음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특히 질풍노도의 시기를 지나는 청소년에게는 더더욱 그럴 것이라 짐작되고요. 저 또한 청소년기를 생각해보면 기쁜 날도 많았지만 욱하고 고민하고 우울하고 예민해진 때도 있었더라고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차가운 링크에 나가 스케이팅을 연습하는 생활이라면, 그러면서도 공부도 해야 하고 대학 진로 걱정, 레슨비 부담, 친구 관계 등등 고민할 거리가 한 두 가지가 아니라면 즐거움보다 우울함이 더 많겠다 싶었어요. 매 대회마다 순위 경쟁해야 하고, 메이컵, 머리, 의상, 몸 컨디션을 신경쓰면서도 심사위원들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저 무결점 연기를 펼쳐야하니 틸리의 마음고충이 남다를 것 같아요.

 

때로는 내가 이렇게 오랫동안 스케이트를 계속한 이유가 바버라 코치님을 대신할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나를 아껴 줄 누군가를, 링크에서라면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으로. (334쪽)

 

틸리도 말한 것처럼 피겨를 좋아하지 않지만 피겨를 계속했던 건 링크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차가운 자신의 손을 잡아줄 누군가를 찾기 위해서였지 싶습니다.

 

중학생 틸리는 같은 학교 친구 레이와 사귀게 되는데요. 레이와 있으면 주면 소음, 근심 걱정이 차단되는 듯 아주 편안함을 느끼게 되죠. 지독하게 자신을 괴롭히는 친구가 있어도 레이가 있었기에 학교를 다닐만했습니다. 둘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떨어지게 되고 레이 엄마가 틸리와 사귄다는 걸 알고 둘이 만나지 못하게 원천봉쇄에 들어갔습니다.

 

첫사랑은 누구에게나 중요하다. 하지만 벽장 안에 있는 어린 동성애자에게 첫사랑은 완전히 다른 의미다. 내가 기억하는 건 짜릿함이나 해방감이 아니라... 두려움이었다. (204쪽)

 

틸리는 커밍아웃을 결심합니다.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그리고 첼로 선생님에게도요. 전 여기서 커밍아웃을 받아들이는 그들의 반응이 참 놀라웠어요. 시크하고도 쿨한 틸리 엄마의 반응을 보면서 저 같으면 어떻게 했을까? 아마 큰일 난 것 처럼 울고불고했을까? 여러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제게 책 페이지 몇 장을 넘기니 뒤통수 한 대를 시원하게 얻어맞는 것 같은 장면이 나왔습니다. 틸리의 커밍아웃에 대한 첼로 선생님의 반응인데요. 첼로 선생님의 열린 마음, 따뜻한 마음이 너무 닮고 싶을 정도로 어른인 제게도 뭉클한 감동을 주네요.

책은 총 열 챕터로 구성되어있는데, 각 챕터의 제목이 피겨 스핀의 이름입니다. 문득 그 스핀들의 이름을 보고 있자니 딸아이가 피겨 배우면서 스핀을 익히려 수없이 찧던 엉덩방아가 생각납니다.

 

물론 지금도 열심히 하는 것들이 있지만 피겨 이전에는 그렇게 기를 쓰고 하는 게 있었나 싶을 정도였죠. 링크에 들어가면 두세 시간씩 혼자 연습을 하는데, 저는 춥다고 곁에서 봐주지도 않고 휴게소에서 창문을 통해 가끔 쳐다보는 정도였거든요.

 

그런데도 엄마가 보든지 말든지 그런 건 아랑곳하지 않고 연습에 몰입해서 원하는 동작을 성공시켰을 때 그 기쁨은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나봐요. 그래서 그 날은 '짤'로 남겨 놨는데, 피겨 관련해서는 사진, 동영상 통틀어 이것 뿐이라 정말 잘했다 싶어요. 으레 아이들이 그렇듯이 좋아하는 거 하나 만나면 장래 직업까지 연결시키곤 하죠. 딸도 그때 꿈은 피겨 선수였어요. 김연아 선수 처럼 될 거라고 하면서요.

 

피겨 선수를 시작 하기엔 늦은 나이라고 코치가 얘기했고, 또 그때 제가 수술한 직후여서 아이스링크까지 픽업하러 다니기엔 체력적으로 무리가 많이 따랐어요. 정말 울며불며 그만두게 했는데, 연습해서 동작을 성공시킬 때 그 느낌을 간직한다면 어른이 되어서 취미로 다시 피겨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피겨 실력을 키우며 성장해온 틸리는 <스피닝>이 피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 책은 기록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느낌을 공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면서요. 자신의 성장담을 얘기하면서 12년간 자신의 일과였던 피겨를 빼놓고는 얘기할 수가 없었기에 피겨 얘기가 나왔으리라 짐작되네요.

 

성장기 소녀의 기쁨과 슬픔, 승리의 짜릿함은 어른이 되어서도 똑같이 느끼는 거죠. 나이가 어리다고 그들의 감정이 결코 가볍거나 시시하지 않음을 알아요. 하지만 똑같이 느껴도 다른 것이 하나 있다면 그런 감정이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는 걸 어른인 지금은 안다는 거죠. 기쁨도 고통도 지나가는 바람처럼요. 단지 산들바람이냐 태풍이냐 그 차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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