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일상

엄마로부터 독립하던 날

꿈트리숲 2020. 6. 23. 06:00

 

사진-핀터레스트

 

어릴 때부터 여자여서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고 여자라서 참아야 하고, 여자라서 나중에 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물론 그렇지 않은 환경도 있겠지만 저와 비슷한 시대에 학교를 다니신 분들이라면 공감이 될 거라 여깁니다.

 

전 안 된다는 이야기에 반감이 들어서 어떻게든 당당하게 능력 발휘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직업도 폼나는 직업을 갖고 싶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조신하게 공무원이나 선생님 하면 얼마나 좋냐고 하는 엄마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고요. 남자들이나 하는 일을 하려 한다는 군소리도 좀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입사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하여 폼나는 직업을 갖겠다는 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죠.

 

1, 2차 목표(대학교와 직장으로 집에서 독립하고픈 꿈)가 틀어져서 3차 목표로 계획 급선회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것도 제 뜻대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서른에 결혼을 하고서야 집에서 떠날 수 있었지요.

 

딸을 객지에 내 보내는 걸 꺼려하신 부모님 영향으로 대학도 직장도 모두 부모님 집에서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분가를 하니 완전 제 세상이 온 것만 같았어요. '이제 진짜 꿈에 그리던 독립이다' 하면서 마치 독립선언문이라도 낭독할 분위기였죠.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같은 지역 그것도 차로 20분 정도 거리에 부모님 집이 있으니 완전 독립은 아직 요원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집안일엔 허당이라 결혼 후에도 엄마로부터 김치며 각종 밑반찬을 공수해 먹었는데요. 그러다보니 부모님 그늘에 있는 거나 매한가지더라고요. 음식을 받아 먹으니 자연스레 저의 집안 살림에도 엄마의 코칭이 들어오고요. 몸은 떨어져도 심리적 끈을 양쪽에서 팽팽하게 잡고 있었던 시기였나봐요. 결혼을 해도 심리적 독립이 같이 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엄마의 음식 지원은 좋은데, 코칭은 받기 싫은 마음이 똬리를 틀어서 ‘결혼을 해도 독립이 안되는구나’하며 넋두리 아닌 넋두리를 했었는데요. 그러면서 남편에게 다른 곳으로 발령 좀 났으면 하고 바랬어요.(그때만도 전혀 발령 날 가능성이 없었기에...)

 

4년 전 울산을 떠나 인천으로 이사를 오고 저의 소원은 드디어 이뤄졌습니다. 부모님을 자주 못 뵙는 아쉬움은 있지만 진짜 독립을 이룬 것 같아 남편에게 생각날 때마다 고맙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져 살게 되니 제일 아쉬운 건 엄마가 해주시던 밑반찬과 김치였어요. 밑반찬은 어찌어찌 만들어 먹겠는데, 김치가 영 해결이 안 되는 겁니다. 결혼 전에는 단 한 번도 김치를 해본 적이 없었고, 시댁 김장 행사에도 한두 번 참여해서 김치에 양념을 묻혀봤던 기억이 다여서 김치를 제 손으로 담그는 건 상상도 못 해본 일이었죠.

 

또다시 택배로 엄마의 김치를 공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엄마는 김치 보내면서 밑반찬도 끼워 보내는 센스를 발휘하셔서 고객 만족에 일조하셨구요. 남편은 저희 엄마의 김치 솜씨를 좀 전수 받으라며 채근했지만 큰 불편 없었기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냈어요.

 

급기야 남편이 나서서 장모님의 김치 담는 비법을 전수 받으려 했습니다만. 엄마의 계량법은 '적당히' 였기에 얼마나 넣어야 할지 대략 난감. 어쩔수없이 제가 팔 걷어붙이고 분연히 일어서게 되는 날이 왔어요(그간 사먹는 김치도 여럿 시도했지만 저희 식구 입맛엔 맞지 않아서 김치 독립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 처음엔 김치 담그는 전 과정을 그려보니 한숨부터 나왔는데요. 한 번 두 번 담가보니 할만하다 싶었어요. 겉절이 뿐만아니라 열무물김치, 깎두기까지 일사천리로 잘 달리고 있습니다.

 

엄마는 언제부터 김치를 담기 시작했을까...? 오늘 겉절이를 담그면서 문득 궁금해졌어요. 옛날에는 택배도 없었을텐데, 결혼하고 외할머니와 다른 지역에 살게 된 엄마는 바로 김치 담그기 실전에 돌입했겠지, 그때부터 엄마는 외할머니로부터 독립을 했겠다 싶었어요.

 

 

개수대를 대야 삼아 배추절이는 신공

 

시장에서 배추 두 포기를 사서 들고 오는데 왜 그리 무겁던지요. 연약한 여자는 아이 키우면서도 튼튼한 엄마가 되어가지만 이러저러한 집안일(사실은 중노동에 가까움)을 하면서 깡으로 다져진 생활 근육을 장착해가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 레시피로도 담아보고, 엄마의 레시피 물어서도 담아보고 하면서 저의 김치 담는 실력은 날로 진화해가고 있습니다. 덩달아 독립도 무르익어 이젠 김치 떨어지면 어서 김치 담가야 하는데... 하는 혼잣말을 하고 있는 저를 발견합니다.

 

집 떠나와 열차타고 훈련소 가던 날 남자는 어른이 되겠지만 여자는 집 떠나와 내 손으로 김치 담그던 날 어른이 되고 독립도 하였음을 느낍니다. 김치 독립은 제가 어른임을 인증하는 카드 같아서 완성하고 나면 항상 뿌듯한 감정이 올라옵니다. 오늘 담근 김치 맛있어야 할텐데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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