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일상

감자꽃 필 무렵

꿈트리숲 2020. 6. 10. 06:00

 

출처 - 네이버 블로그(강원도 여행 사진과 영상)

 

감자의 계절이 왔습니다. 몇 주 전부터 햇감자가 나기 시작하더라고요. 감자전 좋아하는 저는 햇감자 사다가 벌써 감자전 부쳐 먹었는데요. 비 오는 날 빗소리 라임 맞춰 부침개를 좀 구워줬습니다.

 

비 오는 날은 부침개... 저 뭐 좀 아는 뇨자이지요.

어제 소식도 없이 커다란 택배 박스가 왔어요. 어머니께서 감자를 캐셔서 한 박스 가득 보내셨더라고요. 울산에 있었으면 예전처럼 감자 캐는 것도 함께 했을텐데, 올해는 더욱이 코로나로 정신없다 보니 감자 캐는 시기가 되었는지도 잊고 있었어요.

 

 

 

감자 박스를 개봉해서 얼른 몇 개를 삶았어요. 그리고 바구니에 소분하면서 이 감자가 나에게 오기까지 얼마나 긴 여정을 했을까, 또 어머니의 얼마나 많은 정성이 들어갔을까 생각해봤습니다.

 

6월에 본격적으로 햇감자를 캐기 시작하는데요. 그러려면 농사꾼은 겨울부터 감자의 여정을 시작해야 합니다. 감자 심을 밭을 고르고 다지는 걸 해놔야 하고요. 또 씨감자를 준비해서 따뜻한 실내에 잘 보관해두어야 해요.

 

3월 중순 즈음 되면 감자를 심습니다. 감자 심는 일이 중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에 이때는 가족 이웃 사촌 모두 출동해야 합니다. 밭에다 이랑을 길게 여러 개 만들어요. 그리고 검은 비닐을 덮습니다(이유는 잡초가 자라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하네요. 출처 : 영농후계자 될 뻔한 남편의 설명). 이때가 노동의 피크에요. 힘듦의 극한을 경험하는 순간이죠.

 

사실 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해서 얼마나 힘든지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데요. 남편 말로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이라고 해요. 비닐을 다 덮고 나면 일정한 간격을 두고 비닐에 씨감자 심을 만큼의 구멍을 내죠. 

 

3월, 아직 꽃샘추위가 가시지 않은 때 감자심기 노동을 하고 나면 한여름 마냥 땀이 뻘뻘 날 정도입니다. 저희 어머니 말씀으로는 감자가 제일 관리하기가 편한 작물이라고 하셨어요. 심어 놓기만 하면 하늘과 땅과 바람과 비가 다 알아서 키워주기에 그렇습니다. 단 심기 까지는 노동과 정성과 땀이 아주 많이 필요합니다.

 

모내기가 한창인 5월이 되면 저의 시댁 동네는 사방천지가 감자꽃이에요. 전 결혼하고서 난생 처음 감자꽃을 봤는데요. 감자도 꽃이 피는 줄 그때 알았습니다. (저 완전 생물 무식자에 자연 무식자 인증) 감자꽃이 정말 예뻐요. 멀리서 보면 초록 양탄자에 흰 별들이 박혀서 반짝반짝 하는 것 같아요.

 

모두들 모내기에 열중할 때 저 혼자 감자꽃 보며 사진도 찍고 감성에 젖었던 때가 떠오릅니다. 모내기도 참 고된 노동인데요. 그 노동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감자 캐는 시즌이 도래하죠.

 

감자 캐는 것도 정말 만만치 않은 작업입니다. 캐는 것도 힘들지만 감자 표면에 찍힌 자국 없이 캐야 상품 가치가 높기에 집중하는 것 또한 일이지요. 일 무식자인 제가 돕겠다며 덤볐다가 감자에 죄다 호환마마 보다 무서운 호미 자국을 만들어 내서 어머니가 아서라며 일을 못하게 하셨어요. 전 그래서 새참만 나릅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재배하는 감자는 유기농 인증을 받아서 전량 학교 급식에 들어갑니다. 보통 도매로 넘길 때는 박스당 2~3만 원 하는데요. 학교 급식으로는 배 이상의 가격을 받고 판다고 하시더라고요.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감자를 사고 싶지만 어머니의 노동을 생각하면 노동의 가치가 제대로 반영된 가격이 매겨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감자를 받고, 삶고 하면서 감자 재배의 일련의 과정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 갑니다.

감자 캐다가 땅바닥에 앉아 새참 먹는 아이 얼굴에 감자꽃 보다 더 예쁜 웃음꽃이 피었어요. 세상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 얼굴, 저 얼굴 보는 맛에 저 입에 뭔가 들어가는 걸 보는 맛에 어머니는 오늘도 힘든 노동을 묵묵히 해내십니다.

 

예전엔 감자꽃이 필 무렵이면 곧 맛있는 감자를 먹겠구나 생각이 들었다면 이제는 어머니의 힘든 노동이 시작되겠구나를 먼저 떠올리게 됩니다. 어머니, 감자 맛있게 잘 먹을게요. 삶아서도 전 부쳐서도 반찬으로도 간식으로도 다 만들어 먹겠습니다.

 

 

감자여사 분발랐어요^^ - 감자는 자고로 분이 나도록 삶아줘야 제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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