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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 라이프 - 전기밥솥 없이 살기(1탄)

꿈트리숲 2020. 9. 25. 06:00

세 번째이자 마지막이길 바라는 전기밥솥

결혼 전에는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살다가 결혼 후에 처음 내 손으로 밥을 하면서 전기밥솥을 샀다. 혼수품에서 빠지면 절대 안 될 품목이었기에 당시 가장 최신형 제품을 비싼 돈 주고 우리 집으로 모셨다.

 

남편과 나, 둘 다 직장 생활을 했기에 바쁜 아침에 밥을 해결하는 데는 안성맞춤이었던 전기밥솥. 전날 밤 예약을 맞춰놓고 자면 아침에 눈 뜨자마자 밥을 먹을 수 있어서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마이 프레셔스 밥솥’이었다.

 

그러기를 몇 년. 서서히 밥맛이 없어지기 시작했는지, 남편이 ‘장모님 밥’처럼 하는 방법은 없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는 매해 가을, 추수 시즌이 되면 좋다는 쌀을 수소문해서 사들이고, 매 끼니 압력밥솥으로 새 밥을 지었기에 밥맛이 없으려야 없을 수가 없었다. 오히려 밥맛이 없으면 이상할 정도. 그에 반해 우리 집은 전기밥솥에 한 번 밥을 하면 12시간도 좋고 24시간을 넘길 때도 있었으니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엄마의 비법은 압력밥솥이라는 결론을 내고 엄마랑 똑같은 브랜드의 압력밥솥을 집으로 모셨다. 엄마를 모실 수 없으면 압력밥솥이라도…. 하는 심정으로.

 

생각보다 밥은 그럭저럭 잘 되는 편이었는데, 아이 낳고 원인불명의 병(나중에 알고 보니 루푸스)에 걸려 아침마다 손가락 관절을 굽힐 수가 없게 되었다. 압력밥솥 뚜껑을 여닫으려면 손가락을 움직여야 하는데, 도무지 손가락에 힘을 줄 수가 없어 거의 울다시피 열거나 아니면 남편 찬스를 써야했다. 안되겠어서 다시 전기밥솥으로 컴백. 압력밥솥은 엄마에게 기증.

 

한동안 전기밥솥을 신나게 잘 썼는데 (그사이 전기밥솥도 한 번 물갈이 하고) 남편이 또 밥맛을 토로한다.

“쌀을 불렸다가 밥을 하면 밥맛이 더 좋다고 하던데, 쌀을 불려서 해 보는 게 어때요?”

하…. 나는 종일 내 할 일 하다가 때 되면 누군가 차려주는 밥 먹고 잠들고 싶은 게 소원인데, 그 소원 꾹꾹 눌러 참고 그나마 남편 퇴근하기 전 밥을 하는 것만도 대단하다고 여기던 사람.

나의 데드라인은 저녁 6시. 왠지 그 시간을 넘기면 안 될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6시면 마치 신데렐라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주방으로 옮긴다. 남편 오기 전에 밥하고 반찬 만들기를 분주히 하고 있으면 6시 20분쯤 남편 도착.

느려터진 내 손으로는 도저히 20분 안에 밥과 반찬을 우렁각시처럼 뚝딱 만들어낼 수가 없다.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는 건데, 난 절대 양보 없이 6시가 되어야 움직인다. 남편은 퇴근하면 모락모락 김 나는 따끈한 밥상을 원했겠으나 몇 년 살아보니 도저히 그런 로망은 꿈꿀 수 없다는 걸 일찍 알아챘다.

 

그렇기에 주방에서 혼자 동분서주하고 있는 나를 밀쳐내고 두 손 걷고 본인이 직접 나선다. 난 못이기는 척 슬쩍 자리를 피하고 식탁 차릴 준비를 한다. 이런 내가 6시 이전에 주방에서 쌀을 씻어 불리는 일을 하는 건 왠지 내 시간을 빼앗기는 기분이 들어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다시 압력밥솥 검색. 이번엔 양 손가락 다 쓰지 않고 한 손으로 컨트롤 할 수 있는 외국 브랜드 압력밥솥을 모셨다. 디자인과 색감이 완전 취향 저격. 밥맛도 좋으면 금상첨화겠는데, 왠지 밥맛은 신박한 외모에 따라주지 못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솥이 너무 무거웠다. 난 무쇠 냄비도 외모 보고 샀다가 무거워 중고 장터에 팔았던 터라 압력밥솥도 그 길을 갈 게 뻔히 보였다.

 

외쿡에서 온 깔쌈한 압력밥솥은 그렇게 소리소문없이 우리 집을 떠나고, 다시 전기밥솥으로 컴백. 4년 전 이사하면서 그동안 써왔던 두 번째 10인용 전기밥솥(딸랑 세 식구에겐 너무 대용량)을 처분하고 6인용 최신형(밥솥 얼리어답터) 전기밥솥을 새로 샀다. 새거는 역시 넘흐 조아!!! 몇 년 사용하며 패킹도 몇 번 교체하고 내솥도 교체하고 수리도 받고 잘 견뎠는데, 몇 달 전부터 밥맛이 또 이상해진다. 패킹 문제라는 직감이 들어 패킹을 교체했는데 여전히 똑같은 찰기 없는 밥. ‘대체 뭣이 문제여!’ 패킹을 다 빼내고 대청소 돌입하는데, 세상에!! 패킹이 들어가는 홈에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때들이 대략난감할 정도로 끼어있다. 하…. 어쩌란 말이냐. 청소하다 포기하고 다시 압력밥솥을 써칭한다.

 

‘그래, 전기밥솥은 깨끗이 청소할 수 없으니 위생적으로도 그렇고 종일 전기 꼽아놓으니 전기는 얼마나 먹겠어? 전기 먹는 하마지. 이참에 진짜로 압력밥솥에 정착하자.’ 자기 합리화하며 눈에 불을 켜고 압력밥솥을 찾는다.

 

쓰다 보니 길어져서 본격 리얼 솥밥 얘기는 2탄에서 준비하겠습니다. 고슬고슬 맛있게 준비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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