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논어

논어 - 15

꿈트리숲 2018. 11. 19. 08:04

월요일은 논어

월요일은 논어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공자의 삶의 태도, 평생 공부하는 마음가짐 등을 여려 편에서 볼 수 있었는데요. 그런 모습들이 저에게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해줬어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난관에 부딪쳤을때는 공자라면 어떤 결정을 했을까 하고 한번쯤 고민해보기도 하구요. 논어를 한번 읽었다고 해서 바로 군자같은 삶을 살게 되지는 않더라구요. '뭐야, 논어 읽어도 삶에는 별반 차이가 없네.' 할 수도 있어요. 그렇다고 좌절하거나 서두를 필요는 없습니다. 두고두고 읽다 보면 부지불식간에 내 삶에 공자의 말씀이 스며든 걸 느끼는 날이 반드시 올거에요. 나를 완벽한 경지로 밀거나 억지로 당기지 않아도 자연스레 그런 경지에 이르는 날이 꼭 오리라 믿고 17편 시작합니다.

17편은 양화(陽貨)편입니다. 역시나 17편 1장이 양화욕견공자(陽貨欲見孔子)~~~ 로 시작해서 앞 두글자 양화로 제목을 지었지요. 양화는 공자의 삶에 큰 영향을 미쳤던 인물이라고 합니다. 당시 노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삼환(계손, 숙손, 맹손)의 세력을 누르는 정치 혁명을 이뤄냈어요. 그러나 얼마못가 권력을 잃고 제나라 송나라 진나라를 떠돌게 됐어요. 공자 역시도 제자들을 이끌고 14년간 유랑을 다닌 전력이 있죠. 또 공자의 모습이 양화와 비슷했던지 유랑 다니는 곳마다 양화로 오해 받았다고 하는군요. 양화는 공자가 시도하려 했던 정치혁명의 선구자처럼 여겨지지만 결국 실패한 정치개혁은 공자가 정치 아닌 다른 길을 택하는데 일조했을거라는 추측입니다.

17편 11장 예운예운, 옥백운호재(禮云禮云 玉帛云乎哉) 악운악운, 종고운호재(樂云樂云 鐘鼓云乎哉) 문장을 소개합니다. 예다, 예이다라고 말하지만 어찌 그것이 옥백을 말하는 것이겠는가? 악이다, 악이다라고 말하지만 어찌 그것이 종고를 말하는 것이겠는가? 뜻이에요. 요즘으로 치면 대통령이 국빈 방문할 때 선물 교환하고 의장대 사열, 만찬, 군악대 연주등을 하잖아요. 고대시대도 그런 관례들이 있었나봐요. 옥백은 비단에 싼 옥을 말하는데, 외교 전례의 상징이던 옥백으로  선물 교환을 했나봅니다. 종고는 편종과 북을 말하는데요. 이 역시 제례악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악기였어요.  

옥백과 종고가 예와 악을 상징하지만 곧 예와 악은 될 수 없다고 공자는 말합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이고 형식일 뿐이다하고요. 우리가 들여다 봐야 할 것은 예와 악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이 나타내고자 하는 삶의 의미입니다. 예와 악의 형식을 빌어 우리 삶의 질서와 조화를 나타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네요.

17편 14장에서는 도청이도설, 덕지기야(道廳而塗說 德之棄也) 문구가 저를 말조심하게 합니다. 길에서 어설프게 들은 것을 자기 말인양 길에서 연설하는 것은 덕을 길에 버리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남에게 들은 말을 검증도 없이 남에게 전달하는 행동을 경계하라는 의미겠지요. 요즘은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도 하지만 인터넷 상에서 퍼나른다는 표현을 쓰잖아요. 일명 '카더라' 통신이요. 아님 말고 하면서 나도 어디서 들은 얘긴데. . . 죄책감없이 여기저기 옮겨가며 전합니다. 소위 '말 잘한다'는 사람들이 새겨들어야 할 경구겠죠.

입담이 좋은 사람들은 재밌고 흥미진진한 얘기 거리로 사람들을 모으는데, 그 말들의 진위여부를 충분히 가렸는지 한번 따져볼 일입니다. 자신의 인기를 위해 없는 얘기를 지어내지는 않았는지, 부풀리지는 않았는지 부디 덕을 길에 버리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어요. 특히나 좋은 얘기 보다는 안좋은 얘기가 더 잘 퍼지는 경우가 많으니 각별히 신경써야 할 듯 합니다. 때로는 말이 칼보다 더 아프게 사람을 벨 수도 있으니까요.

17편 24장은 공자와 제자 자공의 문답입니다. 자공이 스승에게 군자도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까 하니 당연히 있지 하며 공자가 답하셨어요. 이에 자공 너도 미워하는 것이 있냐 하니 자공도 있다고 답하는데요. 그 자공의 답이 오요이위지자(惡徼以爲知者), 오불손이위용자(惡不孫以爲勇者), 오알이위직자(惡訐以爲直者) 입니다. 남의 지식을 훔쳐내는 것을 지혜로 여기는 자, 불손한 것을 용기로 여기는 자, 남의 비밀을 까발리는 것을 정직으로 여기는 자를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이 대목 읽으면서 뜨끔하네요. 단 한번도 그런 적 없어 하고 자신있게 말할 수가 없어서요. 남의 지식을 나의 지혜인양, 불손을 용기로 착각한 적, 남의 비밀을 얘기하며 난 정직하다 여긴 것을 가슴에 손을 얹고 반성합니다.

17편에서 제가 뽑은 한구절은 17편 2장, 성상근야 습상원야(性相近也 習相遠也)입니다. 태어나면서 사람의 본성은 서로 비슷하지만 후천적 학습에 의하여 서로 멀어지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출생 당시만 보면 거의 모두 초자연 상태인거죠. 걷지도 말하지도, 스스로 먹지도 못하는 상태에요. 병원 신생아실에 누워 있는 아기들을 멀리서 보면 모두 비슷해보여요. 그러던 것이 환경의 영향을 받으며 반복적인 습관이 자리잡게 됩니다. 그리고 배움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되는거죠.

학습(學習)의 습(習)자가 새가 날개짓 100번 하는 모습을 본따 만든 글자거든요. 인간이 보기에 미물에 가까운 갓난 아기새 조차도 멀리 날기 위해서는 나는 연습을 수없이 반복합니다. 우리 인간도 반복적인 학습을 통해 비록 태어날 땐 비슷하더라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는 공자의 말씀입니다. 1편 학이편에서 배움은 기쁨이라고 했는데, 여기서 배움은 인간을 성장시키고 남과 구별되게 할 수 있는 것인 듯 싶네요. 성상근야 습상원야를 배움은 기쁨이자 나를 나답게 하는 것으로 풀이하며 오늘 논어는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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