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노르웨이의 숲

꿈트리숲 2018. 12. 13. 08:17

상실의 시대를 빠져나와 노르웨이의 숲으로

노르웨이의 숲/무라카미 하루키/민음사

젊을 때(뭐. . . 지금도 충분히 젊습니다만.^^) 남녀상열지사를 다룬 통속 소설쯤으로 생각하고 읽은 책이 있어요. <상실의 시대>인데요. 학교 도서관에 족히 열권은 꼽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런 책이라면 굉장히 재밌거나 아님 심오하거나 둘 중 하나일거라 생각했는데, 저에게는 이도저도 아닌 느낌. 특히나 육체적인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오는 책들은 별로라 생각했기에 크게 감명깊게 남은 책이 아니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흘러도 이 책은 절판되지가 않아요. 원래 제목으로 다시 출판되고 예쁜 표지로 변장해서 서점의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더라구요. 서점 갈때마다 드는 생각은 저 책이 재밌었나? 아니면 하루키라는 작가의 유명세로 계속 팔리는건가? 하고 의구심이 드는겁니다. 맨날 째려만 보다가 혹시 예전 청춘의 감성으로 읽다가 알아채지 못한 부분이 있지 않을까 하고 용기를 내서 다시 읽어봤어요.

이번엔 상실의 시대가 아니라 <노르웨이의 숲>으로 말이죠. 책 속의 남녀 주인공들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그들의 심리와 사회 상황도 곱씹어 보며 읽을 수 있는 나이가 된지라 이전의 느낌과는 다르게 다가왔어요. 주인공 와타나베가 서른 일곱에 스무살을 기억하며 이야기가 시작되는데요. 실은 하루키 작가가 서른 여덟에 이 책을 썼다고 하더라구요. 어찌보면 작가가 기억하는 이십대의 시대 모습과 사람들의 심리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어요.

와타나베가 청춘의 역사를 써내려 가고 있을 때 일본 역시 고도 성장의 언덕을 오르고 있을 때였죠. 개인 보다는 집단이 중요할 때였고 정신보다는 물질에 집중할 시기. 그러다보니 개개인의 마음에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들이 하나둘씩 표출되는 것 같아요. 연인을 잃은 아픔, 친구를 잃은 슬픔, 제대로 된 사랑을 채우지 못한 결핍들이 성장 가도를 달리는 사회 속에서 온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때로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으로 출구를 찾기도 합니다.

와타나베는 한 발은 과거에, 한 발은 현실에 담그고 있어요. 현실에 발을 딛을 수 있는 건 나가사와 선배와 미도리가 있어서 가능했지 않을까 싶어요. 나가사와 선배는 멋있는 척은 하지만 그 역시 혼돈의 시대를 사는 청춘입니다. 이성이라는 것은 해야할 일을 잘 알기에 머리는 책으로 채우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존재에 대한 불안은 의미없는 섹스들로 치환하는 것 같더라구요. 마치 어른의 것을 흉내라도 내서 청춘의 혼돈을 없애고자 하는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어요.

p 67 나는 시간의 세례를 받지 않은 것을 읽는 데 귀중한 시간을 소모하고 싶지 않아. 인생은 짧으니까. (중략) 남들과 똑같은 것을 읽으면 남들과 같은 생각밖에 할 수 없잖아.

그의 말에서 느낄 수 있는 것 처럼 어른의 세계는 흉내만 내서는 진입할 수가 없어요. 시간의 세례를 받아야 어른이 되고 남들과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만의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이 제대로 된 어른이니까요.

와타나베의 또 다른 한 축, 상실의 시대에는 나오코가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십대 후반에 평생 친구이자 사랑하는 이를 잃고 마음의 시간이 과거에 붙들려 있어요. 와타나베가 현실로 그녀를 데려오려 하지만 나오코는 끝내 상실의 시대를 빠져나오지 못합니다. 혼돈과 상실이 청춘의 전유물 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그런 불안과 두려움은 없어지지가 않아요. 오히려 부려볼 수 있는 치기마저 없어 더 메말라가는 것 같기도 해요.

상실의 아픔을 충분히 슬퍼하고 뭔가를 배워 나온다 해도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주인공의 말처럼 상실의 끝에서 만나는 또 다른 세계는 불완전한 노르웨이의 숲이에요. 삶 속에 잠겨있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완전함 속에 잠겨 있는 온전한 나를 찾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노르웨이의 숲에서 길을 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p 521 우리는 불완전한 세계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인간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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