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퇴근길 인문학 수업

꿈트리숲 2018. 12. 26. 06:54

옳음을 말할 수 있는 연대

 

고인돌이라는 인문학 수업이 있어요. 제목만 봐서는 역사 수업같은데요. '고전 인문학이 돌아오다'의 앞 글자만 딴 인문학 수업입니다. 저는 이런 강의가 있는 줄을 책을 보고 알게 되었어요. 서울시의 여러 도서관에서 6년째 진행되어오고 있다 하네요. 6년 진행해 온 결과물이 <퇴근길 인문학 수업>이라는 책으로 나왔습니다.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지만 거리와 시간적 제약 때문에 참석하지 못한 분들이 계시다면 읽어 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저도 고인돌 수업에 못가본 아쉬움이 있지만 이전 수업은 책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은 멈춤, 전환, 전진의 부제를 달고 총 3권으로 출간되었어요. 지금 가고 있는 길이 뭔가 아니다 싶으면 일단 멈추고 그런다음 방향 전환을 해서 다시 새 길로 전진하라는 뜻으로 제목을 지은게 아닐까 추측해봅니다. 바쁜 현대일들에게 퇴근길 잠깐 들러 들어볼 수 있는 인문학 수업. 전업주부에게는 좀 이르긴 하지만 출근길 인문학 수업도 있었으면 하는 바램이네요.

전 '멈춤'을 서점에서 잠깐 보다가 도서관에서 빌려 읽을 요량으로 집으로 그냥 왔는데요. 집 근처 도서관에서 빌리는데 몇 주를 기다렸어요. 인문학이 여전히 인기가 많은 듯 합니다. 한때 스티브 잡스로부터 시작된 인문학 열풍이 엄청나던 때가 있었죠. 그때 이후로 좀 많이 식었다 싶었는데, 열풍은 순풍과 미풍이 되어 우리 사이에 계속 남아있나봐요. 언젠가 또다른 폭풍을 일으키려 그 바람은 계속 돌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에요.

'멈춤' 책은 생존과 공존, 대중과 문화, 경제와 세계 그리고 철학과 지혜 파트로 구성되어 있어요. 각 파트마다 3강씩 있고, 각 강의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챕터로 나뉘어 있어요. 책 한권이 1년치 강의와 맞먹습니다. 퇴근길 인문학 수업 3권 읽게되면 3년치 강의를 듣는 거나 다름없어요. 왠지 거저라는 생각이 드네요.

인문학 수업을 찾아가서 듣고, 인문학 책을 보게 되는 이유가 뭘까 생각을 해봤어요. 최진석 교수님은 사람이 그리는 무늬가 문화라고 말씀하셨는데요. 사람이 그리는 무늬를 배우는게 인문학이 아닐까 싶어요. 인문학에 관심갖기 이전에는 사람보다는 물질이 만들어 내는 세상, 물질로 변화되는 세상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어요. 없던 것이 계속 탄생하니까 우리 삶이 눈부시게 달라졌지요. 세상은 과학기술을 등에 업고 눈뜨면 달라지는데 실상 우리의 생각과 마음은 예전 초원을 달리던 때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물질과 본능의 진화 속도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 큰 것이 그 이유일 듯 하고요. 또 하나는 세상이 전에 없던 걸로 채워지지만 점점 더 정의와는 멀어지는 것을 몸으로 체감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요.  더 풍요로워 지는데 왜 불의는 더 늘어나고 불평은 많아질까, 왜 행복지수는 더 내려가는걸까 그런 의문들이 인문학에 관심을 갖는 이유들이라고 여겨집니다.

점점 더 멀어지는 정의를 지켜만 보고 있을 수 없어요. 하지만 정의는 나 혼자 실천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책에 소개된 전미경 교수님의 강의 '진짜 정의는 무엇인가'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정의의 필요성이 확 다가오네요.

p 64 우리 전통에도 정의를 바로 세울 수 있는 정신이 살아있다. '시시비비' 정신이다. 옳고 그름과, 너와 나의 다름의 문제를 따지고 고민해왔다. 여기에 '역지사지'와 '인지상정'을 더하면 우리 사회는 더욱 정의로워진다. (중략) 거대한 철학적 담론 대신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그래서 내가 사는 이 땅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드는 생각이 현재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진정한 정의가 아닐까.

우리에게 역지사지와 인지상정은 지금도 있다고 합니다. 각종 재난 사고에 같이 안타까워 하며 도움의 손길을 보태는 모습이 그것이라는거죠. 다만 아쉬운건 우리 사회의 문제에 대해 사리분별을 토대로 같이 자유롭게 심사숙고하는 것이 아직은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타인의 문제에 같이 아파하고 돕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문제가 나의 문제가 될 수 있음을 기억하고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는 행동이 이제는 필요할 때구나 싶어요.

나 혼자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힘이 약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다수에 의해서 정의가 불의로 바뀔 수도 있구요.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할 수 있는 연대가 탄탄한 사회, 그런 사회가 건강하겠죠. 교수님도 그런 연대가 진짜 정의라고 말씀하시네요. 독일의 교회 목사이자 신학자였던 마틴 니뮐러의 얘기가 정의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처음에 나치는 공산주의자를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유대인을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다음에 그들은 노동운동가를 잡아갔다.

역시 침묵했다.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교도를 잡아갔다.

나는 침묵했다. 나는 가톨릭교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느 날부터 내 이웃이 잡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침묵했다. 그들이 잡혀가는 것은 뭔가 죄가 있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친구들이 잡혀갔다.

그때도 나는 침묵했다.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나를 잡으러 왔을 때

내 주위에는 나를 위해 이야기해 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틴 니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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