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조선, 그 마지막 10년의 기록

꿈트리숲 2019. 1. 21. 07:43

우리조차 관심없었던 우리의 삶에 귀를 기울여 준 사람

 

조선의 얘기는 어릴 때부터 익히 많이 듣고, 많이 보고 왔던 터라 그리 낯설지가 않습니다. 대부분 학교에서 배운 역사책을 통해 그리고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요. 제가 낯설지 않은 내용들은 거의다 왕실 얘기죠. 민초의 삶은 책에서 간간히 접하는 사진들이 전부였는데요. 그것도 역사적 사건을 소개할 때 특정 순간이나 특정 장소에 국한된 거였어요. 그래도 저는 조선 역사에 대한 목마름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서점에서 우연히 책 제목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어요. 조선의 마지막 10년의 기록. 그것도 한국 사람이 아니라 서양인이 기록했다는 것이 더 관심이 가더라구요. 책 속에서 만나는 우리의 조상들은 그동안 보지 못했던 듣지 못했던 모습들을 하고 있어서 적잖이 충격이었어요. 극적으로 만들어진 영상과 교육 목적으로 기술된 책들하고는 많이 다른 모습이어서요. 조선이 역사의 문을 닫은지도 100년이 훌쩍 지났긴 하지만 긴 역사의 흐름에서는 그리 멀지 않은 시간인데, 현재의 저로선 전혀 상상이 되지 않는 다른 세계여서 사진을 보고 또 보고 했어요.

25살의 파란눈을 가진 젊은 청년이 조선을 찾습니다. 제임스 S. 게일이라는 선교사에요. 그는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랐습니다. 다른 선교사들과 집단을 이루어 그곳을 벗어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조선에 뛰어들었어요. 왕실부터 주막까지, 압록강 너머 만주에서부터 부산까지 신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심을 가졌어요. 낯섬에 경악하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혹은 다름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치환하려는 대신 수용하고 이해하고 그대로 인정하는 자세로 조선을 받아들였어요.

게일은 1888년 조선에 입국하고 40여년을 머물렀는데요. 그 중 조선의 마지막 10년을 기록하며 <Korean Sketches>라는 제목으로 서양에 한국을 소개했습니다. <Korean Sketches>의 원서 초판은 서울역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대요. 관심이 없었던 저 같은 사람은 책 존재 자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네요. 이런 역사적 가치가 있는 책이 이제야 번역되었다는 것이 좀 안타까워요.

게일이 그린 조선의 스케치는 어떤 모습일지 한장 한장 넘겨보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조선 방방곡곡을 여행하며 느낀 소회나 음식들 그리고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 참 인상적이었어요. 지글지글 끓고 있는 구들장에서 자면서 통구이 되는 꿈을 꿨다는 얘기, 메주 발효 냄새와 아주까리 기름이 타는 냄새가 섞인 그 냄새를 맡기가 너무 고역이었다는 얘기, 좌식 문화가 익숙지 않아 복숭아 뼈가 발뒤꿈치보다 딱딱하게 될 때까지 양반다리를 했다는 얘기 등을 보면서 우리도 때론 적응이 어려운 일인데 서양인에게는 정말 낯설고 힘들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파란 눈의 낯선 이방인을 보면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나와 여기저기 만져보고 꼬집어보고,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도 힘들지만 동네 개들도 엄청 짖어댄다고 하더라구요.

p 36 "오, 이런! 안 씨, 도대체 이 수많은 개들을 왜 죽이지 않는 거죠?"

"아직 너무 일러요, 나중에 죽일 거예요." 안 씨가 대답했다.

"아니, 나중에 말고 지금이요. 지금 개를 잡으면 바로 마을이 평화롭고 조용해지잖아요?"

"지금이라...... 아시다시피 봄에는 개고기가 별로 좋지 않아요. 여름까지 기다렸다 잡아야죠. 당신 나라에선 봄에 개고기를 먹어요?"

"으악, 아니요!" 나는 놀라서 대답했다. "언제 먹느냐의 문제가 아니에요. 개를 먹는 죄악은 절대 저지르고 싶지 않아요."

"아예 안 먹어요?" 그가 또 물었다.

"절대로요! 우리나라에선 절대."

곧이어 안 씨의 얼굴에 참 덜 떨어진 족속이구나, 하고 우리를 생각하는 표정이 뒤따랐다.

조선 사람과 서양 사람이 개를 놓고 동상이몽을 꾸는 듯 합니다.  우리의 개고기 문화가 엄청 이질적으로 다가왔나봐요. 심지어 죄악이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요.  

책의 한 챕터 제목이 조선 보이라고 기술된 부분이 있는데요. 게일은 그들을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만능 해결사라고 설명합니다. 보이는 보통 열다섯에서 쉰다섯 살 사이이며 서양인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종이라고 했어요. 조선인들은 그들이 모시는 주인에게 진심을 다하고 또 외부에 자신의 주인을 최대한 돋보이게 하려 최선을 다하죠. 그것이 종으로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었고, 어쩌면 운명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어요.

게일은 말하기를 조선에는 일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조선의 고질병이라고 했어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손 놓고 앉아서 시간을 허비하고만 있다 했는데, 쓰러져 가는 조선의 명운을 그나마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는 것도 다 조선 보이라고 불리우는 천민, 그리고 상놈이라고 불렸던 상인들이 부지런히 그들의 역할을 다 해내고 있어서가 아니였을까 싶어요. 저자도 일로 굳은살이 박인 손을 가진 사람을 만나면 아주 기분이 좋다고 얘기해요. 양반은 인류의 수수께끼라고 표현할 정도로 평생 글만 읽는데도 한자를 다 통달하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굶어죽지는 않는다고 책에 서술되어 있는데요. 수수께끼가 가능하도록 하는 데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열일하는 아낙네와 천민, 상인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p 323 조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다. 오히려 서양 사람보다 더 낫다는 게 내 진심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어떠한 서양식 교육이나 고등교육도 추가로 필요치 않았다. (중략) 그들이 아무런 결점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진 탁월함들, 예를 들면 그들 대부분이 아내에게 예를 갖추어 대한다거나, 아이들에게 인자한 것 같은 수많은 행동들 때문이다.

국운이 쓰러져 가는 시기에 조선을 뒤덮은 가난은 끔찍했다고 저자는 말합니다.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까지 이르렀다고요. 그런 상황에서도 일반 백성은 나라탓, 임금탓 하지 않고 묵묵히 살고 있었어요. 조선 사람들은 천성적으로 좋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탁월함을 가졌다는 저자의 말이 저를 기분 좋게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것을 지켜내지 못한 역사가 안쓰럽습니다. 지금 우리에겐 좋은 천성이 남아 있는지, 탁월함도 누리고 있는지 한번 생각을 해봐야 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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