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걷는 사람, 하정우

꿈트리숲 2019. 3. 8. 07:10

 우리는 모두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

걷는 걸 좋아하고 퇴직 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싶다 얘기하는 지인분이 계세요. 걷기 책을 주로 보시다가 나중에 걷기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하셨는데, 이미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는 것 같다고 하시더라구요. 그게 누구에요? 물었더니 하정우라고 하는겁니다. ? 영화배우, 하정우요?

그래서 시작된 <걷는 사람, 하정우> 읽기. 영화를 그닥 많이 보는 편이 아니고 욕과 유혈이 낭자하는 영화는 아예 안 봐서 저에게 하정우 배우는 유명한 사람이 아니었지요. 그러다 신과 함께와 1987을 보고 제 머리에 각인이 된 배우입니다. 화가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책을 쓴다는 것도 놀라웠고, 더욱이 걷기를 하는 사람이었다니 믿기지가 않아요.

<걷는 사람, 하정우>를 읽고 있으니 저도 무작정 걸었던 때가 떠올라요. 원하지 않는 학교, 전혀 생각해보지 않았던 전공을 공부하면서 몸은 멀쩡히 학교를 다녀도 마음은 계속 이건 아닌데, 내가 원하는 건 이게 아니야하며 보냈어요. 4학년이 되니까 다들 취업 준비한다고 두꺼운 문제집과 씨름하는데, 전 하고자 하는 건 분명했으나 제대로 준비도 안하고, 또 입사 시험에 떨어져 방황하는 하루하루가 흘러갔어요.

어느 날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서 한코스 걸어가서 버스타자 생각하며 걸었어요.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몇 정거장은 걸어왔더라구요. 걷는게 어려운게 아니네 싶어 내친김에 쭉 걸었어요. 3~4시간을 걸어갔어요.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요. 학교도 집도 저의 복잡한 머리를 풀어줄 수는 없었기에 학교와 집에서 최대한 멀리 가고 싶었나봐요. 평소 차를 타고만 지나가야 되는 줄 알았던 길들이 걸으며 갈 수도 있다는 걸 알고 매일 걸어서 학교에서 멀리 집과도 반대 방향으로 저를 끌고 갔습니다.

제 방황은 겨울이 되고 날이 빨리 어두워져서 흐지부지 끝맺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 방황이 아니라 치열하게 나를 찾고 있었구나 싶어요. 내가 누군지 알고 싶어 일단 몸으로 저를 시험해봤던 것 같아요. 아무것도 가진 거 없는 저를 그냥 받아주는 거리가 걷기를 부추기고 익명성에 묻히기 딱 좋은 도시 소음이 너는 걷는 거라도 할 수 있다고 얘기해주는 것 같았죠.

p 8 이 점이 마음에 든다. 내가 처한 상황이 어떻든, 내 손에 쥔 것이 무엇이든 걷기는 내가 살아 있는 한 계속할 수 있다는 것.

p 23 길 끝엔 아무것도 없었지만, 길 위에서 우리가 쌓은 추억과 순간들은 내 몸과 마음에 달라붙어 일상까지 따라와 있었다.

걷기를 하면서 문제가 해결된 것은 없지만 그 문제가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길 끝에서 알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육체적 고통이 먼저 엄습해오기 때문에 그에 비하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고민은 사치에 불과했던 거죠. 걷기가 내 상황과 내가 쥔 것하고는 무관하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20대 한 가운데를 통과하는 그때 어렴풋이 알게된 것 같아요.

그 이후 저는 취업을 하고 차를 마련하면서 걷기와 의도된 이별을 했어요. 걷기의 효과와 한 걸음의 의미를 잊고 빨리 뚜벅이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제 다리와 발이 준비 없는 이별이라며 질척거려도 완전히 무시하고 손에 얼마나 많이 쥐었는지 자랑하고 싶었나봐요.
노력은 죽어라고 하는 것 같은데 겉과 달리 내면의 변화가 없어 힘들기만 했던 청춘. 몸과 마음이 다 병들어 가고 있었어요.

p 286 지금 고통 받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내가 곧 노력하고 있는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혹시 내가 정류장이 아닌 곳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는 건 아닌지 수시로 주변을 돌아봐야 한다.

그때의 저를 두고 하는 말 같아서 흠칫 놀랐어요. 노력은 방향과 방법을 정확히 아는 것으로부터 다른 차원으로 확장할 수 있다고 박찬욱 감독 예를 들며 강조합니다. 방향을 고민할 시간이 없다고, 방법을 찾기 힘들다고 어영부영 보낸 청춘은 찬란했던 순간만큼이나 아픔도 많은 시기였네요. 그래도 뚜벅뚜벅 걷다 보니 서른이고 마흔이 왔어요.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육체적 고통도 견디고, 눈물이 펑펑 쏟아지게 시린 마음의 상처도 참으며 왔더니 또 다른 길이 펼쳐집니다. 이제는 제 인생길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어요. 남들 따라 보낸 20대도 좌절과 고통 속에 보낸 30대도 다 괜찮다, 잘했다 싶어서요. 길 위에서 내가 만든 일과 만났던 사람들이 저를 더 걸어갈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p 82 죽을 만큼 힘든 사점을 넘어 계속 걸으면, 결국 다시 삶으로 돌아온다.

죽을 것 같지만 죽지 않는다.

우리는 아직 조금 더 걸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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