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가끔 영화

칠곡가시나들

꿈트리숲 2019. 3. 11. 07:07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지난 금요일 영화 단체관람을 하고 왔습니다. 그동안 영화 본 것도 따지고 보면 다 단체관람이긴 해요. 한날 한시에 한곳에 모여 영화를 보니까요. 하지만 금요일은 달랐죠. 영화관람 하러 모인 사람들 모두 김민식 PD님의 팬이었고 또 거대 영화 체인에 밀려 상영관을 잡지 못한 웰메이드 영화를 응원하러 모인거라 그간의 영화 관람과는 성격이 다르다 생각합니다.

 

 

아마 대학때 이후에 처음이지 않았나 싶어요.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말고 개별 이름이 붙은 영화관에 간 것이요. 소규모 영화관은 거의 없어졌거나 남아있다해도 시설이 많이 노후 되었을거라 생각했는데, 웬걸요. 크기만 조금 작다 뿐 제가 자주 찾는 영화관과 별 차이가 없었어요.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사람들이 엄청 많아요. 저는 PD님 블로그로 신청하고 30명 정도 관람하는 줄 알았거든요. 그래서 나머지 분은 일반 관람객인가 했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다른 SNS계정으로도 신청자를 모집해서 그런거더라구요. PD님이 90분에서 100정도를 초대하신 것 같습니다. 좋은 영화를 살리기 위해서요. 덕분에 공짜로 딸과 함께 멋진 영화를 보는 영광을 누리네요.

 

 

 

제가 이날 찾은 아트나인은 이수역 메가박스 건물 12층에 있는 독립,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곳이라고 합니다. 이미 큰 상영관에서 끝난 영화도 있고, 아예 상영하지 않은 영화도 이곳에서 상영을 하는 것 같아요. 서울 사람들은 이런 곳을 종종 찾나본데, 저는 처음이라 살짝 컬쳐쇼크 입니다. 20년 전에 독립 영화관은 다 문을 닫았다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찾아볼 생각도 못했어요. 영화 보러 가면 으레 3대 영화관만 생각했고, 그 영화관에서 상영하지 않는 것은 못본다 내지는 다운 받아서 봐야지 했죠. 좋은 영화를 어떻게든 찾아서 보는 열정 또한 식은지 오래라 오랜만에 정말 오랜만에 신선한 경험을 했습니다.

 

 

영화는 칠곡에 사시는 할머니들, 더 세부적으로는 이제 한글을 깨친 할머니들의 삶에 대한 얘기였어요. 문맹에서 벗어난 기쁨과 왜 이제야 글을 배우게 됐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할머니들의 유쾌한 일상과 잘 버무려집니다.

 

특이한 점은 할머니들이 한글을 배우시면서 모두 시를 쓰십니다. 글씨가 삐뚤빼뚤, 맞춤법은 틀려도 솔직하고 진심이 담긴 시에 눈물을 훔치는 분들도 많으셨어요. 저런게 진짜 시구나 느끼는 순간 요즘 우리는 너무 멋진 시에 물들어 있는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어요. 그리고 멋진 시가 아닌 것들은 촌스럽다거나 졸작이라 곁눈 한번 주지 않았던 제가 좀 반성이 되기도 하고요.

 

영화는 다큐멘터리 형식이라 할머니들의 일상을 날씨 변화 만큼이나 담담히 소개합니다. 한글을 깨쳐도 할머니들 삶이 드라마틱하게 달라지는 건 없어요. 매일 밥하고 빨래하고 병원 오가는 삶은 똑같아요. 그러나 그 단조로운 일상에 읽고 쓰기가 들어오면서 조용히 파문이 일어납니다. 오가며 간판 글씨를 읽는 희열,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부치려고 팔십 평생 처음 우체국에 가보는 설렘, 죽은 남편을 생각하며 시를 통해 그려내는 그리움 등이 변화의 물결이고 인생의 새로운 무늬지요.

 

어릴때부터 글을 읽고 쓰고 자라난 우리들은 아마 문맹의 불편함과 부끄러움을 잘 모를거에요. 말은 하지만 읽고 쓸 줄 모른다는 것은 삶을 얼마나 단조롭게 만들고 제한하는지 모릅니다. 할머니들의 한글 공부는 일제강점기때 우리말 교육이 금지 되면서 시작되었지만 그 후 전쟁을 겪고 삶의 전선으로 뛰어들어 먹고 살기에 바빠 읽고 쓰기는 영원히 멀어지게 됩니다. 평생을 문맹으로 살게 될 줄은 몰랐지만 모두 그렇게 살기에 한글을 배워야겠다는 절실함은 마음 한켠에 고이 숨겨두기만 했을거에요.

 

일주일에 두 번 경로당을 방문하는 한글 선생님과 받아쓰기도 하고, 숙제검사도 받으면서 꺼지지 않은 절실함이 다시 살아납니다. 인생은 80부터인가? 아니다 인생은 글을 알고부터가 시작이지. 새로움과 조우하는 할머니들의 용기와 끈기가 40, 50만 넘어도 인생 다 산 것처럼 흐지부지 하는 우리들에게 뭔가 메세지를 전하는 것 같아요.

 

용기를 쓰라, 글을 쓰라, 시를 쓰라고요. 매일 글을 쓰면서 매일 오지게 재미나게 나이 드는 할머니들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는 글을 던집니다. 삶이 속이는 것 같고, 슬프게 만드는 것 같아도 오늘 한 줄 글을 쓰고 읽는 것만으로도 난 내일이 설레고 기다려진단다.

 

 

영화 끝나고 김재환 감독, 김민식 PD와 함께하는 질의 응답시간을 가졌습니다. 재밌게 나이드는 것이 삶의 화두라고 하는 두 분은 한 분은 삶으로 보여주고 계시고 또 한 분은 요런 방법도 있지 않을까 하고 영화로 보여주시네요. 감사합니다. 두 분 덕분에 저도 오지게 재미나게 나이드는 방법 하나 알아가요.

 

영화를 보면서 한글을 공부하고 계신 시어머니 생각이 났어요. 맞춤법 잣대를 들이대더라도, 글씨체가 어떻다 왈가왈부 하더라도 사랑하는 손녀에 대한 진심에는 명함을 못 내밀겠지요. 손녀 사랑 듬뿍 담아 편지를 써주신 어머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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