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토지 8

꿈트리숲 2019. 5. 20. 06:20

사람이 온다는 건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어느덧 토지 2부의 끝 8권 이야기까지 왔어요. 처음엔 반신반의 하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느린 것 같지만 이야기는 긴박하게 흘러가서 책속으로 완전 몰입하게 됩니다. 작가의 필력이란 것이 이런건가 싶고 어떻게 그 긴 시간을 수많은 사람을 등장시켜 한명한명 살아있는 캐릭터로 그려냈는지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어요.

1부는 서희와 길상을 비롯해 핍박 받던 평사리 사람들이 간도로 이주하는 것으로 끝났는데요. 2부의 끝은 최참판댁의 땅을 대부분 다시 찾은 서희가 간도를 떠나 진주로 향하는 것으로 마무리 됩니다.

 

서희의 든든한 버팀목이 될 것 같은 길상은 결혼 후에 심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고민하고 외로워 하더니 끝내 진주로 향하는 서희와 함께 하지 않아요. 두 아들을 낳았음에도 아빠로서의 책임감 같은 건 없었는지. 아니 있다고 해도 그것보다 자신의 처지에서 오는 혼란이 서희와 함께 갈 수 없는 이유였나봐요.

 

p 141 나는 돌아간다! 그이가 돌아가지 않는대도 나는 돌아간다! 그것은 애초부터 말없는 약속이 아니었더냐? 그것은 엄연한 약속이다. 이제 내 원한은 그이의 원한이 아니며 그이의 돌아갈 이유도 아닌 것을 안다. ? ? 왜 내 원한이 그이 원한이 아니란 말이냐! 남이니까. 내 혈육이 아니니까.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희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길상에게는 서희라는 사람 자체의 무게도 무게거니와 최참판댁이라는 가문과 그리고 조준구에게 복수하려는 서희의 욕망이 함께 자신을 짓누른다 여기는 것 같아요. 한 사람이 온다는 것은 그의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함께 오기 때문에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정현종의 시처럼 길상은 서희의 오늘만 아내로 맞을 수 없을거에요. 아비의 비참한 죽음, 딸을 버리고 달아난 어미를 가진 서희의 어제와 그에 더해서 조준구에 대한 복수로 이를 갈고 있는 내일의 서희까지 모두를 품어야만 하는 의무가 길상에게는 많이 버거운가 봅니다. 그리고 길상 자신에게는 조준구에게 복수할 절체절명의 이유도 없는거죠. 한이 맺힌 것도 없고 최씨 가문의 재건도 하인이던 시절에나 의미있는 거니까요.

 

길상은 오히려 서희가 망했으면 하는 허왕된 바람도 갖고 있어요. 그래야 오롯이 자기 아내가 되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될 거라는 생각에서죠. 두 사람의 대화가 절실한 대목입니다. 서로 마음속에는 얽히고설킨 이야기 실타래를 갖고 있는데 도무지 풀지를 않습니다. 그걸 풀어내야 외로움을 끝내고 진정한 부부가 시작될 텐데요. 그런면에서는 강단 있는 서희도, 기골 찬 길상도 용기가 없습니다.

 

8권에서는 큰 슬픔이 하나 뚝 떨어집니다. 물론 이제까지 있어왔던 여러 죽음 중 마음이 쓰이지 않는 죽음은 없었어요. 그러나 모질지 못해 다 내어주고 진심을 다 쏟아 붓고 가는 월선의 죽음 앞에는 눈물이 먼저 나와 슬픔을 부채질 합니다. 고등학교 때 이후 책을 읽고 울어보는 건 처음인 것 같아요. 제가 책뿐만 아니라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서도 울지 않는다고 감정이 어쩜 그리 메말랐냐는 말을 자주 듣는데요. 그 이유가 책 얘기 보다도 드라마나 영화의 스토리 보다도 제 삶이 더 극적이어서 그렇다고 응수를 합니다. 그동안 마음을 울리는 스토리를 못 만나서 그랬던가 싶네요. 어쩌면 이제야 제 마음의 빗장이 풀어졌는지도 모르구요. 소설을 읽고 감흥할 줄 아는 마음을 일깨워준 토지가 고맙게 생각됩니다.

 

p 237 월선은 기름 떨어진 호롱의 심지처럼 기름 아닌 심지를 태우고 있는 그런 상태, 죽음은 일각일각 다가오고 있었다. 아니 다가오고 있다기보다 이미 사신은 머리맡에 와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심지를 태우고 있는 불길은 잦아졌다가 아슬아슬하게 되살아나곤 했다.

 

사람 목숨이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통포슬에 사는 용이는 들여다보질 않습니다. 월선의 가족들은 그저 애만 태우고 이제나 저제나 용이가 오기만 기다려요. 용이와 임이네 사이에 난 아들 홍이는 월선의 손에서 자랐기에 월선이를 친 엄마보다 더 따르는데요. 엄마의 죽음이 시시각각 다가오는데 아비인 용이가 찾아오질 않자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직접 찾아가서 어름장을 놓기도 합니다. 그래도 용이는 요지부동이에요. 참 매정한 사람이다 싶어요. 월선이가 죽기 이틀전에 옵니다.

 

p 243 “오실 줄 알았십니다.”

산판 일 끝내고 왔다.”

. 그럴 줄 알았십니다.”

임자.”

.”

가만히.”

이불자락을 걷고 여자를 안아 무릎 위에 올린다. 쪽에서 가느다란 은비녀가 방바닥에 떨어진다.

내 몸이 찹제?”

아니요.”

우리 많이 살았다.”

.”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눈만 살아 있다. 월선의 사지는 마치 새털같이 가볍게, 용이의 옷깃조차 잡을 힘이 없다.

니 여한이 없제?”

, 없십니다.”

그라믄 됐다. 나도 여한이 없다.”

머리를 쓸어주고 주먹만큼 작아진 얼굴에서 턱을 쓸어주고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 눕힌다.

용이 돌아와서 이틀 밤을 지탱한 월선은 정월 초이튿날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언제나 남자의 뜻을 거스를 줄 몰랐던 한 여자는 죽는 순간까지도 남자의 뜻을 기다리려 자신의 목숨을 가까스로 붙잡고 있었던 것 같아요. 남자의 과거와 미래 현재까지 모두 받아들인 월선이는 실로 어마어마한 사랑을 하고 떠납니다. 그래서 여한이 없다고 했을까요? 사랑하는 남자의 품안에서 마지막을 맞이해서요.

 

p 59 공노인은 두메며 길상이며 월선이 봉순이 모두 기찬 얘기책 속의 인물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하나의 인생이 모두 다 기차다.

뜻대로 안 되는 것을 뜻대로 살아볼려니까 피투성이가 되는게야. 인간의 인연같이 무서운 거이 어디 있나.’

 

사람의 인연만큼 정말 무서운게 없나 봅니다. 얘기책 속의 인물들이라 하지만 현실같은 그네들이 우리 주변에 무수히 많다 여겨지거든요. 인연으로 사람을 살리기도 죽이기도 하니 인연이 제일 무섭다는 뜻 아닐까 싶어요. 뜻대로 안 되는 인연, 뜻대로 해보려 안간힘을 쓰다 사라져간 모든 인연들에 대단한 인생이었다고, 잘 살다간 인생이었다고 말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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