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책

여행의 이유

꿈트리숲 2019. 6. 19. 07:21

돌아보지 말고 내다보지 말고 지금 나에게

 

 

p 87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중략) 유인원과 달리 초기 인류는 나무에서 내려와 걷고 뛰었다.

인류는 치타처럼 빠르지 않고, 사자처럼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신 인간에게는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이 있었다.

 

제가 무시무시한 이동 능력과 지구력을 경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이건 여행이 아니고 고행이고 수행이라고 생각했을 정도의 걷기였던 올레길 여행인데요. 걷고 싶지 않았고, 가고 싶은 곳도 아니었지요. 4년전 남편이 산티아고 순례길에 흠뻑 빠져 관련 책들을 보다가 한국에도 그런 길이 있다며 서명숙 이사장의 올레길 책 2권을 냅다 읽고서는 당장 떠나자고 성화였습니다. 그때 남편은 알을 깨고 나오려는 시기였던지라 자아를 찾기 위한 몸부림이 심했었어요.

 

자연을 벗 삼아 걸으며 내면의 성장을 도모하고 싶었겠지만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걸 알기에 전 남편의 쓰라린 마음에 소금을 팍팍 뿌려댔습니다. “여보 현실에서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여행 갔다 온다고 달라지진 않아요. 여기서 해결책을 찾아요.” 라고요.

 

저런 조언같지 않은 조언까지 뿌린건 올레길 걷기가 싫어서였어요. 예전 프랑스 여행 때 홍콩 여행 때 걷다 너무 지쳐 여행을 포기하고 싶었기에 걷는 여행은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어요. 극렬저항에도 불구하고 결국엔 동행하기로 하고 비행기를 알아보는데 연휴 때라 표가 없어요. 여유롭게 표 있을 때 가자고 했더니만 어떤 좌석이라도 있으면 무조건 고!를 외쳐서 비즈니스에 앉아가는 호사를 누렸습니다. 현재까지 처음이자 마지막 비즈니스가 제주행이라니...

 

제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호텔인데요. 집이 근사하지 않아서 호텔을 선호하는 건 아니라고 하고 싶은데, 집을 호텔처럼 만들고 싶은 욕구는 있어요. 그래서 물건들을 비우나 싶기도 하구요. 일단 호텔에 투숙하면 다른 사람들이 제가 해야 할 일을 다 해줍니다. 청소, 식사 준비 등 집에서 해야 할 일들을요. 그러면 전 오롯이 여행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참 좋아요. 여행은 그 나라 그 지역의 싼 숙소에 묵어야 제대로 느끼는거야라고 말하는 분들도 있는데 편하고 깨끗한 호텔 숙소가 제 취향에는 맞더라구요. 저만 이렇게 느끼는가 싶었더니 책에서 같은 이야기를 하는 저자를 만나게 됐네요.

 

p 63 호텔을 좋아하는 이유는 또 있다. 호텔은, 너무 당연한 말이지만, 집이 아니다. 어떻게 다른가? 집은 의무의 공간이다. 언제나 해야 할 일들이 눈에 띈다. 설거지, 빨래, 청소 같은 즉각 처리 가능한 일도 있고, 큰맘 먹고 언젠가 해치워야 할 해묵은 숙제들도 있다. 집은 일터이기도 하다.

 

김영하 작가도 여행지 숙소로서 호텔을 선호하는군요. 반갑습니다. 조식 나와서 좋아, 깨끗해서 좋아 등등의 이유를 붙이지 않고 이런 근사한 이유를 댈 수 있다니 앞으로 여행 때는 저도 이런 이유를 대고 싶어요. 제 논리에 살을 붙이기에 더 없이 좋은 문장들입니다. 올레길 걸을 때 숙소가 게스트 하우스였는데요. 올레길을 걷더라도 숙소는 호텔로 하자는 저와, 올레길 스피릿과 맞지 않다며 현지 숙소로 해야 한다는 남편이 팽팽이 맞서다 절충한 것이 게스트 하우스였지요. 올레길 코스와 숙소 선정에 제가 전혀 개입하지 않았더니 불편과 맞닥뜨릴 수 밖에 없는 숙소를 예약했더라구요.

 

하루 종일 걸은 몸을 편하게 뉘이고 싶은데, 뚫린 방충망 사이로 들어온 모기를 잡느라, 쫄쫄쫄 흐르는 시냇물 샤워기에 의지해 몸을 씻느라 거의 몸과 마음은 만신창이 되었어요. 학교 가기 싫어하던 딸은 갑자기 학교 가고 싶다며 울고불고, 전 올레길 제안했던 남편에게 울화가 치밀어 한숨만 쉬고요. 3차대전 발발 분위기였으나 간신히 참고 다음날 아침 숙소 주인이 끓여주는 톳 떡국에 간밤 부글부글 끓었던 마그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떠나오는 저희를 문밖까지 마중 나와 손 흔들어주던 주인 부부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네요. 그 분들에겐 일터인 곳이 저에겐 불만족스럽긴 해도 하루 호텔이었습니다. 제가 식사에서 해방되었던 곳이어서요. 잠자리 정리와 청소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었기에 그러네요. 무엇보다 아무도 그 누구도 아닌 저를 환대하며 맞아주고 따뜻한 음식으로 배려해주며 특별한 사람으로 격상시켜준 곳이기에 그렇습니다. 상황 탓만을 하던 저의 눈을 다시 저 자신에게 돌릴 수 있게 만들어준 감사한 여행이었어요.

 

 

김영하 작가는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후회와 불안은 우리의 현재를 위협하는 어두운 그림자라고 하면서요. 매일 매순간 현재를 살면서 과연 나는 얼마나 지금에 집중하고 있나 생각해보니 자신이 없어요. 몸은 순간을 살고 있는지 몰라도 정신은 과거와 미래를 왔다 갔다 하며 후회와 불안을 몸에 주입하고 있거든요. 여행은 현재에 집중할 수 있게 해줍니다. 나를 돌아보지 않게, 나를 내다보지 않게, 오로지 지금 나만 쳐다보게 해주는 여행. 그 여행 후에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고 집중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짧은 여행에서 지금에 집중하는 연습을 했기에 평생 해야 하는 긴 여행인 삶에서 그 연습이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싶네요.

 

바다와 강이 만나는 곳에서 순간에 집중하고 있는 아빠와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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