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일상

베르나르 뷔페전

꿈트리숲 2019. 8. 21. 07:19

때로는 비효율이 최고의 효과를 가져다 준다

 

 

효율적으로 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하나를 하더라도 시간을 좀 절약하는 방법을 쓰자고 마음먹고 병렬적 인간이 되려고 하는데요. 설거지할 때 영어를 듣는다든지 명상을 하고, 화장실에서는 긍정문을 읽고요. 엘리베이터 기다릴 때는 시 한편이라도 읽으려고 해요.

 

목적지에 가서는 한 번 방문에 볼 수 있는 건 많이 둘러보려 하는데요. 뜨거운 여름날 저는 효율과는 먼 하루를 보냈습니다.

 

아이 방학하자마자 <그리스 보물전>을 다녀왔었어요. <그리스 보물전>은 예술의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이죠. 미술관 1층에는 <베르나르 뷔페전>이 열리고 있는데요. 아이는 베르나르 그림 보기를 더 원했고, 저는 그리스 보물전을 반값에 예매 해뒀고요. 그래서 최종 선택은 <그리스 보물전> 관람이었어요. 전시 보고 나와서 온 김에 베르나르 것도 보고 가자는 아이 말에 당일 하루치 순두부 체력을 이미 소진해버린 저는 다른 날 보러 오자고 아이를 설득했습니다. ‘하루에 한 전시만 보자. 그래야 여운을 오래 가져가지하면서요.

 

방학이 짧기도 했지만 방학 동안 울산도 다녀오고 연주회 연습도 하느라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어요. 개학을 코앞에 두고 베르나르 얘기를 다시 꺼내는 딸. 그러게 그날 같이 보고 왔으면 됐을텐데... 지나고 나니 후회가 됩니다. 순두부 체력 쥐어짰으면 전시회 하나 정도는 더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면서요.

 

 

오전에 스케줄 하나 소화하고 오후에 미술관으로 갔어요. 햇빛이 쏟아지다 못해 들이붓는 날. 사람들도 많고 차도 많고. 주차는 야외 주차장 밖에 자리가 없더라구요. 차도 익고 사람도 익을 것만 같은 날이었습니다.

 

베르나르 뷔페프랑스 화가인데요. 뷔페전 전시회가 아니었다면 몰랐을 화가에요. 늘 유명한 화가만 익숙하게 보이고, 또 그들의 그림을 자주 보기에 새로운 화가, 낯선 작품을 찾아 볼 생각을 못합니다.

 

전시관 벽에 걸린 뷔페의 대표 작품인 광대는 뭔가 아기자기하고 밝고 몽글몽글 그림을 봐왔던 저에게 도전적인 그림이었어요. 화가의 내면이 불안과 공포로 가득 차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을 줬는데요. 왜 그렇게 표현했을까? 하는 물음표가 그림을 다 둘러보고는 아! 그래서 그랬구나 하는 느낌표로 바뀌었습니다. 심지어 피카소나 마티스 못지않게 뷔페의 그림이 좋아지기도 하네요.

 

 

 

베르나르 뷔페는 1928년에서 1999년까지 살다간 화가입니다. 그렇기에 젊은 날 세계대전을 눈앞에서 겪었을거에요. 전쟁의 참상을 있는 그대로 그림에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시대의 우울과 공포를 뷔페만의 방식으로 녹여낸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림 대부분에서 검은색이 주요 선으로 표현되었더라구요. 작가의 마음, 시대상을 피사체가 아니라 그림 기법으로도 표현할 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어요.

 

뷔페는 이미 젊은 나이에 유명해졌는데요. 20세에 얻은 명성과 영광을 누리지 않는 쪽을 택했나 봅니다. 명성에 대한 무관심이 베르나르에게 영원한 젊음과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 원천을 제공했다고 하더라구요.

 

영감을 믿지 않는다. 단지 그릴 뿐이다라고 했던 뷔페.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현대인의 눈으로 보면 효율적이지 못하다 생각이 들었어요. 컴퓨터가 똑똑한 앱 하나가 온갖 기법이나 화법을 다 표현해주기에 그렇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화가들이 했던 비효율적 작업이 없었더라면 컴퓨터나 앱에 화려한 기법을 넣을 수 있었을까 싶어요. 때로는 비효율이 가장 효과적이다는 생각이 들어요.

 

 

 

 

뷔페 그림을 보다 보면 아내 아나벨 뷔페 그림이 많이 보여요. 뷔페의 영원한 뮤즈였다고 하는데요. 사진을 보니 엄청난 미인입니다. ‘당신은 내 열정적인 사랑을 일깨웠다. 당신이 아니라면 절대 몰랐을...’ 아나벨을 그린 그림에도, 그 외 다른 그림에도 뷔페의 열정이 투영될 수 있게 한 것은 아나벨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림에 열정과 사랑을 쏟아부어서 그럴까요? 앤디 워홀은 내가 인정하는 프랑스 회화의 마지막 거장은 베르나르 뷔페이다.” 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그림을 볼 줄 모르는 제가 봤을 땐 낯선 곳으로 이끄는 익숙한 발걸음을 느끼게 해주는 그림. 비효율의 극대 효과를 느끼게 하는 그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전시 끝부분에 광대 그림이 여러 작품 걸려있어요. ‘광대는 모든 종류의 변장과 풍자로 자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다는 문구와 함께요. 그렇다면 화가는, 뷔페는 모든 종류의 물감과 붓, 그리고 그림 주제로 자신의 욕망도 채우고 자신의 감정까지 표현했다 싶어요. 매일 글을 쓰는 저는 무엇으로 욕망을 채우고 감정을 표현할까 생각해봅니다. 되든 안되든 매일 글을 써보는 비효율, 그것이 좋은 글에 가까워질거라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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