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가끔 영화

엑시트

꿈트리숲 2019. 9. 19. 07:13

쓸모없음의 쓸모

 

 

지난달에 목수정 작가의 강의를 듣고, 또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앞으로 천만 영화는 보지 않겠다 마음 먹었어요. 우리나라의 영화가 돈이 되는 대작들만 영화관에 걸리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상영관을 찾기조차 힘든 실정이거든요.

 

봄에 <칠곡가시나들> 영화를 김민식 작가님이 아트나인 영화관의 한 관을 대관해서 단체 관람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감독이었던 김재환 감독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어요. 거대 자본에 밀려 작은 영화들은 점점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요.

 

그래서 저라도 천만 영화는 패스해야겠다 다짐하고 있었습니다만. 추석 연휴라는 복병을 만나서 그 다짐은 그만 물거품이 되고 말았네요.

 

남편과 딸이 연휴에 영화 한 편 정도는 봐줘야 한다며 성화여서 따라나섰습니다. 결국엔 천만 영화에 카운트 하나 더 보탰습니다. 영화관 안 가겠다고 한 사람 어디 갔나요? 할 만큼 영화 시작되고서는 주인공 동선 따라 제 몸도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할 만큼 몰입을 했습니다.

 

영화 속으로 잠깐 들어가 볼게요. 9백만이 넘게 본 영화라 대충의 줄거리는 알고 계실 겁니다. 청년 백수, 만년 취준생 용남이의 엄마의 칠순 잔치가 벌어지는데요. 그때 도시에 유독가스가 퍼집니다. 가스에 노출되면 피부가 화상을 입고 목숨까지 위험하기에 모두 높은 곳으로 피해야만 합니다. 그 과정이 참 긴박하면서도 몰입감 있게 펼쳐져서 재미가 더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재난은 지진, 태풍, 폭발, 홍수 등이었는데 이제는 가스 누출도 배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의도치 않게 새어 나온 것도 있겠지만 누군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가스를 누출한다면 걷잡을 수 없이 퍼져서 재난이 될 것 같더라구요. 충분히 발생 가능한 시나리오여서 영화 보며 SOS 모스 부호부터라도 입에 익혀 놔야겠다 했습니다.(SOS 따따따 따~~~ 따따따)

 

흔히 재난 영화 하면 긴박하게 달아나고 위기의 순간에 구출되는 장면들이 등장하는데요. 꼭 그럴 때마다 고구마 같은 사람이 나서서 주인공 앞길을 막는다든지, 아님 네가 먼저 구출되야 해 아니야 네가 먼저하면서 신파 같은 요소가 꼭 삽입되죠.

 

엑시트엔 그런 고구마와 신파가 없어서 시원하게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현실과 동떨어진 스토리도 아니구요. 한국형 재난 영화라고 할 만큼 영화 곳곳에 한국적인 요소가 잘 녹아 있었어요.

 

 

재난이 발생하면 인명을 구출할 때 이제는 기계들의 도움이 꼭 필요한데요. 엑시트에서는 드론의 역할이 두드러졌어요. 기계치인 제가 반할 정도였는데, 드론에 관심 있는 분들은 이 영화 보는 재미가 더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기계와 친숙해지는 방법 모스 부호에 이어 알아둬야 할 것 같습니다.

 

 

영화 포스터에서 용남과 의주가 방독면 쓰고 뛰어가는 사진을 봤는데요. 그때 방화복 색깔이 참 컬러플 하다 생각했어요.(제가 눈이 많이 나쁩니다ㅠㅠ) 요즘 방화복 완전 멋진데 하고 말이죠. 영화 보고 알았어요. 정말 제 눈이 노안이라는 것을요.

 

용남과 의주가 긴박한 상황에서 가스를 피해 탈출해야 하는데, 장소가 칠순 잔치가 열리고 있는 뷔페라 종량제 쓰레기봉투를 활용했어요. 아이디어가 번뜩인다 싶었어요. 이 부분에서 왜 하필 쓰레기봉투였을까 궁금하기도 하구요. 장소가 장소인지라 개연성 있는 활용인가 생각도 들었는데요.

 

 

용남은 만년 취준생으로 입사 시험에 번번이 낙방해서 가족들에겐 밥만 축내는 잉여 인간 취급받습니다. 더군다나 대학 다닐 때는 취업에 도움 되는 동아리도 아니요 스펙에 한 줄 그을 만한 취미도 아닌 산악부 활동을 했거든요. 그래서 더더욱 쓸모없음 취급 받죠.

 

돈 될 것 같지 않던 그 동아리 활동이 취업에 아무 도움 안 되었던 암벽 등반이 자신의 목숨 뿐만 아니라 여러 목숨을 구하는 것 보고서 쓸모없음의 쓸모를 발견했지요. 쓸모없음을 대표하는 쓰레기봉투로 온몸을 꽁꽁 싸매고 탈출하는 모습이 저에겐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잉여는 언제까지나 잉여가 아니고 쓸모없음도 반드시 쓸모 있을 때가 있다는 것, 엑시트 보며 다시 확인하는 기회였어요. 천만 영화, 많은 사람들이 보는 데는 이유가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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