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가끔 영화

82년생 김지영

꿈트리숲 2020. 1. 31. 06:00

지영아, 너 하고픈 거 해

 

 

 

설 연휴에 친정 시댁 방문 다 패스하고 집에서 세식구 복닥복닥 삼시세끼 해먹으며 보냈어요. 지난 추석에 고향 방문을 건너 뛴지라 이번 설에는 꼭 부모님 뵈러 갈려고 했는데, 건강의 변수가 생겨서 또 그냥 지나가게 됐습니다. 작은 선물로 제 마음 전했는데, 잘 받아주셨으리라 믿어요.

 

민족 대이동 대열에 합류하지 않으니 조용하고 고요한 날들이라 전 참 좋았는데요. 남편은 너무 조용하다며 영화라도 보자고 제안합니다. 요즘 영화관 가는 것도 시큰둥해서 개봉 영화 소식은 깜깜해요. 그래서 집에서 다운 받아 보기로 하고 검색 중 몇 달 전 개봉한 <82년생 김지영>을 남편이 추천해줬어요.

 

이 영화는 제가 한창 아플 때 개봉해서 저 빼고 남편과 딸, 둘이서 보고 왔던 영화에요. 보고 와서 남편이 제 손을 잡고 울면서 영화 얘기를 전해줬어요. 영화 보는 내내 제 생각이 많이 났다고 하면서요. 이름도 똑같고, 아픈 것도 비슷하고,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사는 것까지요. 

 

영화 속 김지영에게는 배려해주고 위로해주는 남편이 있는데 현실의 정지영에게는 자신이 좋은 남편이 되어주진 못한 것 같아 참 많이 미안하다고 하더라고요. 전 남편이 못한다는 생각은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는데, 남편 입장에서는 못했던 생각만 드나봐요.

 

남편이 어떤 이유로 이 영화를 추천하는지 알겠기에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에 눈과 귀를 집중했어요. 처음부터 '어? 나랑 똑같네' 하는 장면이 더 몰입하게 만들어요.

 

 

 

손목 보호대를 하고 아이를 안고 집안일을 하는 모습, 제가 딱 저 모습이었습니다. 아이 낳자마자 루푸스가 발병 했는데, 원인을 몰라서 1년을 그냥 보냈어요. 그때 당시 손목, 손발 관절이 너무 아파서 양 손목에 보호대 착용하고 파스도 여기저기 붙여가며 이유식을 먹이고, 기저귀도 갈고 했더랬죠.

 

82년생 김지영은 저와 여덟 살 차이 나는데, 현실 육아에선 8년 차이가 무색하게 어쩜 그리도 비슷할까 싶었어요. 병증이 깊어지기 전엔 가장 가까이 있는 남편도 집안일과 육아가 얼마나 힘든지 잘 알지 못합니다. 으레 다 그런가보다 하지요. 김지영도 '빙의'라는 다른 사람이 되는 증세를 보임으로써 남편이 심각성을 깨닫게 되죠.

 

정지영(김지영)은 꿈이 많은 사람이었지요. 좋은 대학을 나오고 좋은 직장에서 커리어를 잘 쌓아 멋지고 당당하게 살고 싶었어요. 그런데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승승장구 하는 다른 사람을 보며 '난 아직 많이 부족하구나. 더 노력해야 하는데.' 하면서 저를 계속 몰아 붙였어요.

 

마음은 더 이상 몰아 붙이지 말라고 SOS를 보내는데 그 신호를 계속 무시하고 오로지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그 생각 하나로 달렸던 과거가 있습니다. 지칠대로 지친 마음은 아마도 제 몸을 살려야겠다 생각해서 저를 병들게 했던 것 같아요. 김지영 역시 하고 싶은 것은 마음에 두고 현실에 최선을 다합니다. 때론 멍하니 때론 달리며 자신을 다독여 보지만 지친 마음은 쉽게 회복되지 않습니다. 지영 자신을 보호하고 살리는 방편으로 빙의를 택한 건 아닐까 싶었어요.

 

잠시지만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그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생각만해도 무섭습니다. 그런데 영화에선 지영이가 다른 사람이 되는 순간은 사이다 마시는 것 같은 통쾌함, 시원함을 주는 장면이었죠. 며느리로서, 딸로서, 엄마로서 하지 못했던 우리의 이야기를 대변해주는 것 같아서 저는 속 시원했어요.

 

영화는 오늘을 사는 김지영이 느끼는 좌절, 실패, 불안, 우울 등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에서 기인한 부분들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김지영의 엄마에 할머니까지 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가족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희생했던 과거들이 사라지지 않고 대를 이어 내려오는 느낌도 들고요. 

 

김지영 이야기가 많은 관심을 받고 책이나 영화가 사람들에게 회자된다는 건 우리 사회의 생각 스펙트럼이 그만큼 넓어졌다는 뜻 아닐까요? 나의 아픔을 부담없이 얘기하고 또 그 이야기를 색안경 끼지않고 들어주는 사람들이 있어 분명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되고 있다 생각합니다. 

 

사회는 영화나 소설로 문제를 끄집어내서 해결 방식을 찾는다면 개인은 어떤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요. 

 

김지영 : 선생님, 저는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요.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내로... 가끔은 행복하기도 해요. 그런데 또 어떤 때는 어딘가 갇혀 있는 기분이 들어요. 이 벽을 돌면 출구가 나올 것 같은데 다시 벽이고, 다른 길로 가도 벽이고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던 건 아닐까... 이런 생각이 들면 화가 나기도 하고요. 사실은 다 제 잘못이에요. 다른 누군가는 출구를 찾았을텐데, 저는 그럴 능력이 없어서... 낙오한거에요.

선생님 : 지영씨 잘못 아니에요.

김지영 : 그럼 왜 저만 엉망일까요?

선생님 : 예전에 화가 나거나 답답할 때 어떻게 했어요?

 

개인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방법 찾기 노력을 해야겠지요. 위의 김지영 대사가 제가 남편 붙잡고 넋두리 할 때 했던 말과 똑같습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 그러나 이루지 못한 꿈, 분명 누군가는 이뤘는데, 그 사람과 나의 차이는 노력의 차이? 혹은 능력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루저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요. 선생님이 그러시네요. 지영씨 잘못 아니라고요.

 

 

 

그럼 왜 저만 엉망일까요? 이 물음에 선생님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지만 대안은 제시해주는 것 같아요. 잘하는 일, 좋아하는 일, 너 하고 싶은 거 눈치보지 말고 해보라고요. 영화 속 김지영은 그 일이 글쓰기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거 해보고 싶으세요. 지영이 엄마가 하는 말이 꼭 74년생 정지영인 저에게 하는 말로 들려요. "지영아, 너 하고픈 거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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