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싯다르타

꿈트리숲 2020. 2. 10. 06:00

대우(大愚)는 대지(大智)에 통한다

 

 

 

 

책을 읽어보기 전에는 석가모니의 생애를 소설로 쓴 작품이라 생각했는데요. 싯다르타와 석가모니는 소설 속에서 다른 인물로 그려집니다. 싯다르타는 실존 인물인 부처의 어릴 적 이름으로 ‘목적을 달성한 자’라는 뜻이라는군요.

 

싯다르타는 바라문(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가르치는 것은 무엇이든 잘 깨치고, 지식욕에 불타올라 아버지는 싯다르타가 위대한 현인이자 바라문의 우두머리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어요.

 

그러나 싯다르타는 진정한 깨달음에 대한 목마름을 해소하고자 친구 고빈다와 함께 구도의 길에 오릅니다.

부와 권력을 다 버리고 사문(떠돌아다니며 도를 닦는 탁발승)이 된 싯다르타의 목표는 오직 하나, 모든 것을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모든 욕망, 소원, 꿈에서 벗어나면 자아가 극복된 궁극적인 무엇을 찾게 되리라 생각한 것이죠.

 

기나긴 사문의 길에서도 싯다르타의 갈증은 하나도 줄어들지 않아요. 그러던 중 세상의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를 정지시킨 부처에 대한 소문을 듣습니다. 싯다르타는 부처, 고타마를 만나면 자신의 갈증이 해결 될거라 생각하고 고빈다와 함께 그를 만나러 갑니다.

 

부처의 설법은 경탄할만한 내용이었지만 싯다르타는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아 다른 길을 가려 하고, 친구 고빈다는 부처의 제자가 되기로 해서 둘은 헤어지게 되죠.

 

속세를 버리고 깨달음의 길을 한동안 걸었던 싯다르타는 다시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그곳에서 기생 카말라를 만나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 사랑을 알게되고요. 카말라를 통해 카마스와미를 소개받고 부를 축적하기도 하죠.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지요?

저는 사색할 줄 압니다. 저는 기다릴 줄 압니다. 저는 단식할 줄 압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쓸모가 있지요? 예컨대 단식 같은 것 말인데요, 그게 무엇에 좋지요?

나으리, 그것은 아주 좋습니다. 단식은 먹을 것이 떨어졌을 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지요. 예컨대 싯다르타가 단식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다면 당신한테서, 아니면 다른 데서라도 오늘 당장 아무 일자리건 얻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입니다. 배가 고파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게 될 테니까요. (97쪽)

 

거상 카마스와미와의 면접에서 싯타르타가 그와 주고받은 대화인데요. 저는 사색과, 기다림, 단식 이 세 가지가 이 세상 어떤 것보다 강력한 무기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먹는 것 앞에서 혹은 돈 앞에서 우리는 때론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눈앞의 것을 덥석 물어버립니다. 혹은 시간을 들여야 익어가는 음식과 시간을 들여야 깊어지는 관계에서 기다림의 시간을 삭제해버리고 결과만 취하려고도 하죠. 사색과 기다림, 단식의 능력은 곤궁하지도 비참하지도 비굴하지도 않게 해줄 무림고수의 비법 같다 싶네요.

 

속세에서 사랑하고 돈을 벌기도 흥청망청 쓰기도 했지만 내적인 불만이 없어지지 않는 싯다르타. 카말라를 떠나 홀로 방황하다 뱃사공 바주데바를 만나게 됩니다. 그와 함께 생활하며 싯다르타는 한 단계 더 나아간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바주데바는 경청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싯다르타는 자기 속마음을 다 얘기 하고 싶어하지요. 바주데바는 그런 싯다르타를 아주 온화한 미소로 바라보고 그저 듣기만 합니다. 해결책 같은 건 제시해주지 않아요. 깨달음은 싯다르타 스스로 얻게 만들죠.

 

싯다르타는 바주데바와 함께 뱃사공 일을 하는데 매일 강을 오가며 강물을 보고 자아를 성찰하고 깨달음을 얻어갑니다.

그러다 싯다르타의 아들을 데리고 나타난 카말라는 만나게 되는데요. 카말라는 죽게 되고 싯다르타가 아들을 돌봅니다. 아들은 아비의 지극정성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도망쳐 버리는데, 이때 싯다르타는 이전에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절망감 상실감을 경험합니다.

 

아버지 또한 자기 때문에, 자기가 지금 자기 아들 때문에 겪고 있는 것과 똑같은 고통을 겪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는 당신의 아들을 다시는 보지도 못한 채 이미 오래전에 홀로 외롭게 돌아가시지는 않았을까? (192쪽)

 

성찰을 하고 깨달음을 얻은 사람도 자식때문에 속 끓이고 또 자신이 부모가 되고 나서야 부모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싶네요. 자신이 떠나올 때의 아버지의 심정을 생각한 싯다르타는 자식에 대한 집착을 놓게 됩니다.

 

어느덧 노인 된 싯다르타에게 노승이 된 친구 고빈다가 찾아옵니다. 고빈다는 여전히 구도의 길을 가고 있지만 해탈을 얻지도 열반의 경지에도 도달하지 못해서 불안한 얼굴이에요. 그런 친구에게 싯다르타는 마치 고타마 같은, 부처 같은 말을 전합니다. 이미 싯다르타는 부처가 된 것 같은 표정과 얼굴이에요.

 

지혜라는 것은 남에게 전달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네. 지혜란 아무리 현인이 전달하더라도 일단 전달되면 언제나 바보 같은 소리로 들리는 법이다. (중략)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중략) 내가 깨달은 최고의 생각이란 이런 것이야.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마찬가지로 진리이다! (206쪽)

 

싯다르타의 성장을 보면서 이는 작가의 성장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어요. 한편으로는 우리의 성장을 생각하게도 하고요. 싯다르타가 그렇게 찾고 싶어했던, 자아를 극복한 그 무엇은 현실을 벗어나서 찾기는 힘든 것이었습니다. 현재를 충실하게 살면서 그 속에서 배우는 것이 있고 깨우치는 것이 있었지요. 나와 대척점에 있는 것도 인정할 줄 아는 지혜를 현실속에서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태어나서는 부모에게서 배우고, 성장기엔 친구와 동료로부터, 청년기엔 사랑을 통해서, 재물과 일을 통해서 배우고요. 나이 들어서는 사색을 통해 자아와 끊임없는 대화를 하면서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싯다르타입니다. 세상에 스승이 아닌 사람이 없고, 세상에 배움 아닌 곳이 없듯, 모든 진리는 그 반대도 진리라는 말은 법정 스님의 말씀 -“대우(大愚)는 대지(大智)에 통한다”-을 떠오르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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