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움/인문학

호질 - 범의 호통

꿈트리숲 2020. 11. 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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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모녀 백일장 도전기를 얘기하면서 전국 고전 읽기 백일장대회를 말씀드렸어요. 백일장대회는 예선과 본선으로 나뉘는데요. 본선에서는 당일 대회 시작과 함께 고전 한편씩 받게 됩니다. 그 자리에서 읽고 독후감을 쓰는 것이지요.

 

제가 받은 작품은 <호질虎叱>이었습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실려있는 작품인데요. 열하일기를 읽을 때는 <호질>의 가치를 크게 느끼지 못하고 지나갔어요. 왜냐하면, 열하일기 중 관내 정사 편에 실린 짧은 글이기도 했고요. 또 연경으로 가던 도중 옥전현의 어떤 가게 벽에 붙어 있던 글을 베낀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행이던 정진사와 박지원이 반씩 나누어 베껴서 합친 글이 <호질>이 되었던 거죠.

 

중국 어느 가게에서 밤에 촛불을 켜놓고 베끼는 것이 수월하지는 않았을 터, 정진사가 베낀 분량에서는 빠진 부분도 많고 잘못 쓴 글자도 많아서 도무지 문장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박지원이 수정하고 첨가하여 글 한 편을 완성했습니다. 제목도 없던 글을 박지원이 제목을 붙였어요. 박지원의 손에서 재탄생했으니 박지원의 <호질>이 되었고, 또 우리의 고전 문학이 되었던 거죠. 하마터면 읽고도 그 가치를 모르고 지나갈 뻔했던 작품 <호질>,  후기를 남깁니다.

 

호질은 청 시대에 아첨하는 선비를 풍자한 내용인데, 조선 후기 유학자들의 허례허식과 위선, 그들의 가식적인 면면을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연암은 이 <호질>을 조선에 소개하며 양반사회를 풍자하고 유학자들을 꾸짖으며 조선의 근본적인 변화를 바랐던 게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호질>의 대강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범은 슬기롭고, 성스러우며, 문무를 겸하고, 자애롭고, 효성스러우며, 지혜롭고 어질며, 웅장하고 용맹하여 천하무적인 동물입니다. 그런 범이 사람을 잡아 먹을 때는 오로지 주린 배를 채울 때인데요. 그러나 배가 고파도 아무 사람을 잡아먹지는 않습니다. 

 

날이 저물어 범이 무얼 먹을까 고민하니 창귀(범에게 잡아먹혀 심부름을 하는 죽은 이의 혼백)들이 먹잇감을 추천하는데요. 맛 좋은 고기로 선비를 추천하지요. 그러면서 등장하는 이가 있었으니, 정나라의 어떤 고을에 사는 ‘북곽 선생’이라는 선비입니다. 자신이 교정한 책이 만 권이고, 유교 경전을 손봐서 지은 것이 일만 오천 권이나 되는 명성이 자자한 유학자였죠. 그리고 같은 마을에는 ‘동리자’라는 과부가 사는데요. 일찍이 수절과부가 되어 나라에서 현숙함을 칭송한다고 마을 이름을 동리자 이름을 넣어서 하사했어요. 그런데 이 과부에겐 성씨가 다른 다섯 아들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동리자 방에서 북곽 선생의 목소리가 들려요. 둘은 정을 통하려 하다 동리자의 아들들에 들킵니다. 다섯 아들이 들이닥치자 북곽 선생은 선비의 체면이고 뭐고 줄행랑을 칩니다. 정신없이 달아나다가 그만 똥통에 빠지는데요. 버둥거리며 빠져 나와보니 눈앞에 범이 딱 버티고 있어요. 북곽 선생은 머리를 조아리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데, 범은 구역질이 난다며 먹지 않습니다. 대신 그의 위선을, 선비의 아첨과 양반의 이중인격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꾸짖고 가버립니다.

 

범의 세계에서 홍수나 가뭄을 모르기 때문에 하늘을 원망할 리 없고, 덕이고 원수고 다 잊어버리고 사는지라 남과 어긋나는 일이 없다. 하늘의 운명을 알아서 순종하며 살기 때문에 무당이나 의원의 간교함에 넘어갈 턱이 없고, 타고난 성품에 따라 저 생긴 대로 살다 보니 세속의 이해관계에 병들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 범이 슬기롭고 성스럽게 되는 까닭이다. -호질 중-

 

범이 참 논리적으로 말도 잘한다 싶지요? 범의 입을 빌어서 박지원이 하고 싶었던 말을 담았다 싶어요. 대놓고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 비꼬고 꼬집으며, 풍자 속에 촌철살인을 담아서 양반의 폐부를 찌른 듯싶습니다.

 

허례와 허식이 넘쳐나던 시대를 꾸짖었던 연암이 지금의 우리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아주 잘한다고 칭찬하기는 좀 어렵겠죠? 양반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양반 노릇을 하려는 사람이 있고,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위선과 아첨, 가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변한 게 없다고 혀를 끌끌 차지나 않을까 모르겠어요. 범이 지금 나타난다면 구린내가 아직도 없어지지 않았다고 호통을 칠 것 같네요.

 

“선생께선 이 글을 베껴서 무엇에 쓰려고 합니까?”

“귀국해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한번 읽히려고 합니다. 응당 배를 잡고 웃다가 웃음을 참지 못해 뒤집어질 겁니다. 입 안에 있던 밥알이 벌처럼 뿜어 나올 것이고, 갓끈이 썩은 새끼줄처럼 끊어질 것입니다.” <열하일기 김혈조 옮김 390쪽>

 

입안에 있던 밥알이 벌처럼 뿜어 나오는지  한 번 확인 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웃음 뒤에 진한 씁쓸함이 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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