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움/일상

루이 14세 이야기 (주: 역사이야기 아님)

꿈트리숲 2020. 12. 4. 06:00

늑대를 나타내는 라틴어 lupus

난 루푸스 환자다.

2005년 아이를 낳고 병명을 모른 채 시름시름 앓다가 1년이 지나서 병을 알게 되었다.

2006년 11월 루푸스 진단을 받았다.

 

루푸스가 뭐예요?

루푸스의 정확한 이름은 전신성 홍반성 루푸스이며, 주로 가임기 여성을 포함한 젊은 나이에 발병하는 만성 자가면역질환이다. 자가면역이란 외부로부터 인체를 방어하는 면역계가 이상을 일으켜 오히려 자신의 인체를 공격하는 현상을 의미하며, 이로 인해 피부, 관절, 신장, 폐, 신경 등 전신에서 염증 반응이 일어나게 된다. 루푸스는 만성적인 경과를 거치며 시간에 따라 증상의 악화와 완화가 반복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늑대에게 물리거나 긁힌 자국과 비슷한 피부 발진이 얼굴에 나타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사람에 따라 루푸스가 발병하는 위치도 증상도 다양하다. 나는 손가락 발가락 관절을 쓸 수 없었고, 신장이 많이 상했었다. 루푸스 치료로 관절은 정상으로 돌아왔지만 나빠진 신장은 회복이 안 되었다. 루푸스는 완치가 안 되는 병이다.

 

그래서 난 아직도 루푸스 신염 환자이다.

올해로 루푸스 진단받은 지 14년.

어제 진료를 받고 약국 가서 약을 사 나오는데, 약을 한 아름(선물 꾸러미도 아닌데) 들고나오는 내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졌다.

난 어쩌다 루푸스 환자가 되었을까? 왜 아직도 루푸스와 이별하지 못한 걸까?

 

의사 선생님은 지난번 검사보다 약 5% 정도 나아졌다고 했다.

하지만 아직 위험한 수준이니 언제든 이상이 느껴지면 바로 병원을 오라고 했다.

지난 14년간 병의 상태는 마치 주식 그래프처럼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며 우상향 해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작년 이맘때 재발해서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폭락한 그래프가 올라오지 못하고 있다.

 

약을 가방 가득 쑤셔 넣고도 옆구리에 한 봉투를 끼고 올만큼 난 약 없이는 살 수 없다.

어쩌면 밥은 안 먹어도 약은 꼭 먹어야 할지 모른다. 이런 나를 난 사랑할 수 있을까? 어제 글에 남들이 봐주지 않는 꽃이라도, 향기 없는 꽃이라도 나를 아끼고 사랑하자고 했었다. 그 말을 떠올리며 나를 사랑할만한 점을 찾아본다. 없다. 그런데, 그런데도 나는 나를 사랑해야만 한다. 예쁘지 않아도 향기가 없어도 약으로 연명하는 목숨이라도.

 

약을 이고 지고 걷는데 마스크 사이로 눈물이 흐른다. 삶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행이라고 하지만 난 기본 고행 값에 건강 문제가 더해져 마음이 곱절은 힘든 것 같다. 잘 살고 싶은데, 건강하게 살고 싶은데, 루푸스와 이별하고 싶은데.

 

집에 와서 약들을 정리하고, 다음 진료 영수증 챙기는데 약값 영수증이 보였다. 약값 계산할 때 금액을 대충 들었던 터라 얼마인지 확인해본다. 7만 원이 넘는 금액이다. 약값이 꽤 나왔네 하고 보는데, 약제비 총액에 깜짝 놀랐다. 747,650원. 그렇다. 나는 약값뿐만 아니라 진료비도 검사비도 10%만 낸다. 건강보험 공단에서 지정한 중증질환 산정특례자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국가지정 관리 환자이다. 산정특례자가 아니었다면 어제 지급할 돈은 진료비, 검사비, 약값 합쳐서 86만 원 정도 됐을 것이다.

 

갑자기 눈물이 또 난다. 난 국민이 낸 건강보험료 덕에 병을 치료받고 있는 거였다. 남편의 건보료는 물론이고, 이웃들이 십시일반 보태 준 건보료로 10%만 내고 병원에 다니고 약을 사고 있다. 감사한 눈물이다. 아픈 건 나 개인의 일인데, 치료는 이웃이 함께 도와주는 셈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도와주고 있는데, 우울함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고 힘을 내자. <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처럼 우울하지만, 돈가스는 먹고 싶어. 딸과 함께 돈가스를 썰며 꿀꿀함을 날린다. 나를 도와주는 이름 모를 많은 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푸스와 별하고픈 14년 차 환자 드림.

 

이제 루이 15세 시작. 이별할 수 없다면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을 연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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